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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정조의 업적 1 ( 탕평책, 신해통공, 문체반정 )

by 무님 2020.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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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하자마자 문화 정치의 표방을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작성지화의 명분으로 초계 문신제를 실시하는 등 인재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규장각

 

 

1. 탕평책 - 준론탕평

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책을 역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과는 달랐다.

정조가 즉위하던 시기 때는 혼인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완론 탕평이 사실상 무너지고 척신들에 의한 정계 장악이 심화되었던 때가 되었다. 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척족인 경주 김씨 세력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척족인 풍산 홍씨 세력이 영조 말기에는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이러한 점에서는 왕권의 추구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준엄한 의리를 중시하는 탕평인 준론탕평을 펼치게 된다.
사실 정조 재위 초반에는 자신의 궁료 출신들이 좀 더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홍국영과 서명선이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이후 숙위대장과 도승지를 겸직하면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고, 여러 정파들을 아우르면서 이른바 세도를 부렸다. 서명선은 소론 출신으로 정조의 대리 청정을 적극 추천하면서 정조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인한을 실각시키는 상소를 올리며 역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홍국영이나 서명선 모두 정조가 꿈꾸던 탕평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홍국영은 세도를 부리고 왕위 후계에 욕심을 내다가 결국 실각당했고, 서명선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남인을 견제하는 바람에 도리어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을 때 보호 세력이 없어서 결국 실각당했다. 이후 정조는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당했었던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적극 등용하면서 정계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한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조 스스로가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그동안의 파괴적인 정국 운영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즉 영조의 탕평책보다는 좀 더 진전된 탕평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러 정파를 등용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추숭 문제로 그 세력이 다시금 두 계열 즉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러한 당파 다툼이 그동안 벽파와 시파를 온건하게 규합해오던 김종수와 채제공이 죽은 이후에는 두 세력을 막을만한 기재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정조의 업무가 격화가 되면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그야말로 탕평 정치가 다 소용 없어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영조 정조 업적비교

구분

영조

정조

정치 군사

쌍거호대(雙擧互對)

왕권강화

노론 소론 견제 군제 경제 개혁탕평파육성

정국안정 이조전랑 통정권페지 한천법의개혁

청류탕평

시파 등용(채제공)

장용영 설치(12,000 명, 수원성 축조),

규장각 설치(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의 연구기관, 진보적 학자 등용 -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사회경제

균역법실시 신문고 부활 서원난립금지

1791년 신해통공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 폐지, 노론의 정치자금원 차단

사상들의 세 수입 증대를 통해 국가 재정의 기반을 굳히는 방안

한계

강력한 왕권에 의한 정쟁의 억제에 불과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노론 중심으로 전개됨

한계 : 붕당 간의 융화나 붕당 자체의 해체에는 실패

대표문헌

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속대전』, 『무원록』등)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등을 편찬

 

영조 (완론탕평책)

* 균역법 - 역의 부담을 고르게 하는 법!

-정남(병역의무자. 16세~60세 남자)이 군대에 가는 대신 1년에 1인당 2필씩 내던 군포를

1필로 줄여주는 대신 하층 양반 일부도 1필씩 납부하게 하여 역의 부담을 경감시킨 제도이다.

* 악형 금지- 모진 형벌을 금지!

-낙형(불로 지지는 고문) 난장형(닥치는 대로 때리는 고문) 등 모진 형벌을 일체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 신문고의 부활- 태종 때 처음 도입되었으나 연산군 때 폐지한 것을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 속대전편찬- 경국대전을 개정하여 만든 법전

* 속오례의 - 영조의 특명으로 이덕수, 유수원 등이 편찬한 예절서

* 동국문헌비고 편찬 - 문물제도를 정리한 백과 사전

 

 

정조 (준론탕평책)

* 탕평책 계승(원래 사상은 정말 좋았습니다. 대립을 없애도 타협을 통해 발전해나가는..)

* 규장각 설치 -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학자를 길러내는 정책 연구기관.

- 수 만 권의 책을 갖추어 두고 젊은 학자들을 모아 학문과 정책을 연구한 곳으로

규장각의 수많은 도서들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으며 서울대 도서관 이름 또한 규장각이라고 합니다.

* 장용영 - 임금 호위목적의 부대.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친위부대

* 화성 - 1794년부터 2년 반 걸려 1796년 완성된 성. 정조는 자신의 부친 사도세자를 죽이고

자신의 집권을 반대하던 기득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거점을 수원에 마련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성벽의 총 둘레는 약 5.7㎞, 평균 높이 5m 정도이며 이 성의 축성에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돕던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처음으로 사용된 곳입니다.

 

 

금난전권

 

2. 신해통공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상업이 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이 국역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특권이 적어지면서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독점적 상권을 인정해주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금난전권은 결국 도시의 상업을 폐쇄적으로 바꿔놨고, 물가의 상승을 초래하여 영세 상인과 수공업자 및 도시 빈민층들에게 위협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러한 시전 상인들은 중앙의 고관들과 연계가 되면서 역시 폐단을 낳게 되었다. 중앙의 고관 특히 노론들과의 연계는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켜 탕평책을 펼치려는 정조의 정책에 이반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개가 필요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는 통공 발매 정책이었다.

사실 통공 발매 정책은 영조 시기인 1764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사안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1787년 일부 통공 발매 정책을 시행하였고 1791년에 이르러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 의해 통공 발매 정책이 제기가 되었고 결국 시행을 하기에 이른다. 통공 발매 정책은 그동안 독점권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던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공 발매 정책을 통해서 그동안 경화되어있던 상업 구조의 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노론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전 상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면서 준론 탕평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조선이 한 단계 발전되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중앙 정부에 의한 특권이 없어지면서 상업이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3. 서체반정

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개혁 정책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조선 개국기에는 반듯반듯한 고려풍 안진경체, 전기에는 정밀하고 우아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중기 무렵에는 품위 있고 강경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이나 선조가 명필로 이름난 왕족들이다. 특히 선조는 워낙 유명해 그의 글씨를 명나라 사신들도 탐을 냈으며 본인도 자신의 글씨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석봉을 매우 총애해 석봉체로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글씨에 기반을 둔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대가 내려갈수록 화려해졌다. 영조 시기 즈음 되면 그 당시의 남성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님들과는 다르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서예 철학이 매우 뚜렷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철학은 유지되어 그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게, 꾸밈없이 소박하게 써야 한다고 믿었으며, 양난 이후로 바뀐 서체를 점잖은 서체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굵직하고 소박하며 남성적인 서체는 조선 후기에 주류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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