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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11

나경언의 고변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 중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내용 외에도 역적모의를 꾀한다고 무고했다. 이는 소론 일파의 재기를 우려한 노론의 발상이었다. 휘녕전에 엎드린 세자는 끝내 역적모의를 부인하자 영조는 요천검을 내려 자결하라고 명했다. 임금과 세자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던 영의정 홍봉한은 파직되고 후임으로 신만이 임명되었다. 신만이 임금에게 자결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자 영조는 살기등등하여 그에게 세자보다 먼저 죽고 싶으냐고 호통쳤다. 마지막으로 임덕재가 죽기를 각오하고 간언 했으나 역시 쫓겨나고 말았다. 덕성합에서 이 살벌한 소식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듣고 있던 세자빈 홍씨는 통곡하였고 세손도 울면서 어머니 .. 2020. 9. 3.
사도세자의 방탕생활 3. 1761년 영조 37년 4월 동궁의 시종들과 세자빈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안감사 정휘량의 감언에 따라 세자는 평양으로 떠났다. 물론 영조의 윤허도 없이 몰래 떠난 것이었다. 20일 만에 돌아온 세자에게 동궁의 유선 서지수, 대사성 서명응, 장령 윤재겸 등이 부왕을 만나 요서를 빌라고 건의하였으니 세자는 이들에게 폭언을 퍼붓자 세자의 장인인 우의정 홍봉한이 울면서 건의하였다.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부왕을 만났다. 겉으로는 평양을 다녀온 문제는 수습되는 듯했다. 당시 영조는 여러 후궁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젊고 발랄한 문 숙의도 있었지만 새 중전 김씨에게 한동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조는 문 숙의의 처소를 찾았다. 이때 숙의 문씨는 영조에게 아양을 떨었다. "전화, 신첩의 소원은 나라 안의 명승.. 2020. 9. 3.
사도세자의 방탕 생활 1. 1744년 영조 20년 1월 세자가 열 살이 되자 동갑인 홍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홍씨는 홍봉한의 딸로 1735년 영조 11년 6월에 태어났고 이 여인이 후일 혜빈으로 봉해지는 혜경궁 홍시로서 정조의 어머니다. 세자빈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그 해 자신을 위해 특별히 실시된 문관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고, 그 뒤 영의정까지 올라 노론의 거두가 되었다. 1747년 영조 23년 12월 세자가 13세 때 조세를 체납한 백성들을 감옥에 가두는 일이 벌어졌는데 겨울 찬 바람이 몰아치는 감옥에 체납자들을 몰아넣고는 발가벗겨 추위에 시달리게 하는 잔혹한 방법을 썼다. 영조는 형조판서 이종서에게 대신들과 상의하여 다른 방법을 쓰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때 대신들 앞에서 세자가 겁 없이 엉뚱한 반박 질문을 던졌다. .. 2020. 9. 2.
혜경궁 홍씨의 그날의 기록 <한중록>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의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도 불리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빈(嬪)으로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正祖, 재위 1777~1800)의 생모이다. 생전의 존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이며 사후의 시호는 헌경(獻敬)이다.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아들인 장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1750년(영조 26) 장남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을 낳았고, 1752년(영조 28) 차남인 정조를 낳았다. 그리고 뒤이어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1814)와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1802)를 낳았다. 하지만 맏아들인 .. 2020. 8. 26.
뒤주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잘 알 듯이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했다(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貞聖)왕후(1692∼1757)ㆍ정순(貞純)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靖嬪) 이씨(1694~1721)ㆍ영빈(暎嬪)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그 중 5녀는 일찍 사망했다). 첫 아들인 효장(孝章)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숙종 45년(1719)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영조 4년(1728) 11월 16일).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 2020. 8. 25.
사도세자, 운명의 그날 < 임호사화 > 임호사화는 1762년(영조 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만든 사건이다. 임오화변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비상식적인 재난, 변괴를 뜻하는 '화변'으로 명명되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령했고,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윤 5월 13일 영조는 창덕궁에서 갑자기 사도세자를 불러내었다. 이에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원들과 세자와 동궁을 호위하는 익위사 .. 2020. 8. 20.
소론이 주도한 반란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을 말한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의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현좌(玄佐)이다. 청주(淸州) 송면(松面) 출신으로 조선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후손이다. 조부인 이운징(李雲徵)은 숙종 때에 승지(承旨)·강원도 관찰사·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처는 남인(南人)의 거두인 윤휴(尹鑴)의 손녀 윤자정(尹紫貞)이다. 이인좌는 남인의 명문가 출신이다. 조부 이운징은 탁남(濁南)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그와 가깝게 지냈으며, 처조부인 윤휴는 청남(淸南)의 영.. 2020. 8. 14.
영조, 정쟁의 폐단을 없애다 < 정미환국 > 정미환국이란 1727년(영조 3)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정국(政局)이다. 정미환국의 배경 - 병신처분으로 권력을 장악한 노론은 숙종과 결탁하여 남인과 소론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이 낳은 세자(경종)을 폐출하고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를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를 위해 노론은 일종의 덫으로서 세자의 흠결을 잡기위해 대리청정을 맡기도록 숙종에게 청하고 비슷한 생각으로 세자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내심 연잉군을 보위에 올릴 생각이었던 숙종도 그에 응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경종의 대리 청정은 그를 쫓아내게 할 만큼의 흠집이 발견되지 않았고, 노론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급격히 병약해져 원래의 계획을 실행할 틈도 없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이에 경종이.. 2020. 8. 6.
연잉군 (훗날 영조) 은 경종을 독살 했을까? 조선의 20대 왕인 경종이 이복동생이자 당시 세제 신분이었던 영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은 이 사안은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조선을 50년 동안 뒤집고 흔들어댄 초대형 사건이었다. 이 독살설이 등장한 배경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비롯된다. 원래 몸이 허약하던 경종은 1724년 8월 2일부터 건강이 위독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병상에 누워있다가 2주 정도가 지난 20일에 저녁식사로 게장과 생감을 식사로 먹었는데, 이 게장과 생감은 전통적으로 한의학계에서 매우 나쁘게 보는 음식이다. 결국 식사 직후부터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자 의관들은 경종이 한의학적으로 꺼리는 게장과 감을 먹은 사실을 알고 곽향정기산과 두시탕, 인삼차를 계속 처방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고, 24일 오전에 경종은 아예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 .. 2020. 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