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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혜경궁 홍씨의 그날의 기록 <한중록>

by 무님 2020.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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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헌경왕후)의 본관은 풍산()이며 혜경궁 홍씨( )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라고도 불리는 장헌세자()의 빈()으로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 재위 1777~1800)의 생모이다. 생전의 존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이며 사후의 시호는 헌경()이다.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영조(, 재위 1724~1776)의 아들인 장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1750년(영조 26) 장남인 의소세손(, 1750~1752)을 낳았고, 1752년(영조 28) 차남인 정조를 낳았다. 그리고 뒤이어 청연공주(, 1754~1814)와 청선공주(, 1756~1802)를 낳았다.

하지만 맏아들인 의소세손은 3살 만에 죽었으며,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던 남편 장헌세자도 1762년(영조 38)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죽었다. 당시 영조는 장헌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겠다는 명을 내리고 한밤중에 세자빈이던 헌경왕후와 세손인 정조 등을 모두 친정인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했다. 그래서 헌경왕후는 장헌세자가 죽은 뒤에야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762년 7월 12일(음력 윤5월 21일)에 영조는 장헌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에게 왕세자의 호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헌경왕후에게는 혜빈()이라는 존호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헌경왕후의 부친인 홍봉한()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고, 그가 1771년 김귀주() 등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도성에서 내쫓겼을 때에도 1년 만에 서용하여 관직을 되찾고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여 헌경왕후를 배려하였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뒤에 혜빈궁()의 명칭을 혜경궁()으로 바꾸었으며, 1783년(정조 7)에는 자희()와 효강()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795년 회갑을 맞은 헌경왕후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썼는데, 이 작품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더불어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헌경왕후는 1816년 1월 13일(순조 15년 12월 15일)에 사망했으며, 경기도 화성의 융릉()에 남편인 장헌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순조는 그녀에게 ‘헌경()’이라는 시호를 부여했으며, 고종 때인 1899년에는 의황후()라는 시호가 부여되었다.

 

 

 

 

* 한중록 (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인 회고록 )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의 배후에는 홍국영()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을축 4월 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가 돌아간 해이다.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와 벽파()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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