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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소론이 주도한 반란 <이인좌의 난>

by 무님 2020.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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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을 말한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의 본관은 전주(), 본명은 현좌()이다. 청주() 송면() 출신으로 조선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 이구()의 후손이다. 조부인 이운징()은 숙종 때에 승지()·강원도 관찰사·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처는 남인()의 거두인 윤휴()의 손녀 윤자정()이다.

이인좌는 남인의 명문가 출신이다. 조부 이운징은 탁남()의 영수인 허적()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그와 가깝게 지냈으며, 처조부인 윤휴는 청남()의 영수였다. 그러나 남인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西)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은 다시 정권을 장악했으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권에서 내몰렸다. 이인좌의 조부인 이운징도 경신환국 때에 도배()의 형을 당했으며, 그 뒤 기사환국으로 다시 관직에 올랐다가 갑술환국으로 유배를 당해 1710년에야 풀려났다. 하지만 1717년 죽었을 때에도 흉당()으로 몰려 왕의 명령으로 대신으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처조부인 윤휴도 경신환국 때에 사사()를 당했다.
이처럼 숙종 때에 있었던 세 차례의 환국 과정에서 남인과 이인좌의 집안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갑술환국 이후에는 정권에서 배제되어 관직에도 오를 수 없었다. 1724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서인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커지자 박필현()·이유익()·심유현()·정희량() 등 소론 강경파는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과 연합해 노론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노론에 의해 왕위에 오른 영조를 폐위시키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을 옹립해 노론 세력을 축출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각지에서 동조세력을 모았다. 남인 명문가 출신인 이인좌와 그의 형제들도 이러한 정변의 모의에 참여해서 영남 지역의 사족들을 끌어들이고 병사를 모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727년 영조가 이광좌()와 조태억() 등 소론 온건파인 완소() 계열의 대신들을 다시 등용한 정미환국()이 이루어지면서 정변에 동조하는 세력을 확대하기가 어려워졌다.

 

 

 

 

난의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온건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동조자의 확대가 어려웠고 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 최규서()의 고변을 비롯해 양성인() 김중만() 등이 각지의 취군() 동태를 속속 고변하였다.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하였다

 

난은 3월 15일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반군은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군관 홍림()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주었다.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조석으로 곡배하였다. 그리고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使) 박민웅() 등에 의해 상당성()에서 궤멸되었다. 한편, 이인좌의 반란에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호응하였다.

영남 지방은 정온()의 4대 손인 정희량()이 조묘의 천장()을 구실로 민정()을 모집해, 이웅보( : 이인좌의 동생)와 더불어 3월 20일 안음의 고현창()에서 일어나 안음현감과 거창현감을 투서로 위협해 쉽게 두 지역을 장악했다.

이어서 합천에 거주하는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 일족의 도움으로 합천·함양 등 4개 군현을 석권하였다.

이에 경상감사 황선()은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의 관군을 통솔해 토벌하였다.

반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계를 넘어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호남 지방의 반군은 태인현감 박필현이 모주()로 무장()에 유배중인 박필몽() 등과 내통하였다.

그러나 전라 감사와의 연결에는 실패해 박필몽은 상주의 촌리에서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박필현은 고부군 흥덕()을 거쳐 죽도에 잠복했으나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3월 14일 최규서의 고변을 비롯하여 경기도 각지에서 취군 현황이 속속 보고되자, 영조는 도성문을 폐쇄하고 경외()의 관군을 동원해 서울의 방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병조판서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使)로, 박찬신()을 도순무중군()으로,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삼아 난의 토벌에 나섰다.

관군은 3월 24일안성·죽산의 반군을 소탕하고, 이인좌·권서봉·목함경() 등을 생포하였다. 안성·죽산에서의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에는 영남 지방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소탕되었다. 이인좌는 죽산의 정세윤 부대와 합류했으나 죽산에서도 토벌군에 패하자 산사로 도주했다. 하지만 죽산의 농민인 신길만()과 주민들에게 붙잡혀 토벌군에 넘겨졌고, 5월 2일에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결국 이인좌는 영조의 친국을 거친 뒤 5월 5일에 처형되었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해 4월 19일 개선하였고,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가 영접하였다. 난의 평정에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정국 추이에 그들의 처지를 약화시켜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에 영조 즉위초부터 주창되어온 탕평책의 실시는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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