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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사도세자의 방탕 생활 1.

by 무님 2020.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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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 영조 20년 1월 세자가 열 살이 되자 동갑인 홍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홍씨는 홍봉한의 딸로 1735년 영조 11년 6월에 태어났고  이 여인이 후일 혜빈으로 봉해지는 혜경궁 홍시로서 정조의 어머니다.

세자빈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그 해  자신을 위해 특별히 실시된 문관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고, 그 뒤 영의정까지 올라 노론의 거두가 되었다. 

1747년 영조 23년 12월 세자가 13세 때 조세를 체납한 백성들을 감옥에 가두는 일이 벌어졌는데 겨울 찬 바람이 몰아치는 감옥에 체납자들을 몰아넣고는 발가벗겨 추위에 시달리게 하는 잔혹한 방법을 썼다. 영조는 형조판서 이종서에게 대신들과 상의하여 다른 방법을 쓰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때 대신들 앞에서 세자가 겁 없이 엉뚱한 반박 질문을 던졌다.

"...임금의 덕화에 따라 그 나라의 태평성대가 좌우되지 않습니까? 임금이 성현 군자 일 것 같으면 어찌 백성들이 나라에 충성하지 않을 수 있으며, 조세도 자진하여 바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감옥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부왕이 덕이 모자라고 성현 구자가 못 되기 때문에 정사가 이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당돌하기 짝이 없는 세자는 진노한 영조에게 뺨을 맞았다. 그 뒤 영조는 중전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를 경덕궁으로 옮겨 가게 하였다. 부왕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세자는 나인들에게 공연한 트집을 잡아 역정을 부리곤 했다. 심지어 음식 투정을 일삼고 밥상을 발로 걷어차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세자가 부왕에게 비뚤어진 마음을 드러내다 궁중은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으나 두 패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 하나는 임금의 측근에서 정적인 소론을 제압하고 있는 노론 일파이고 다른 하나는 소론 일파였다. 소론은 어떻게든 조정에서 노론을 쫓아내야겠다고 벼르던 차에 세자와 임금의 반목을 빌미로 세자에게 접근했다. 더욱이 세자가 신임사화에 연루된 노론을 몹시 싫어하고 있다는 점을 소론 측에서는 잘 알고 있었다.

 

영화 <사도>

 

1748년 영조24년 봄 세자가 14세 때 금호문에 벽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벽서의 내용은 세자가 거처하는 경덕궁에서 역적 김일겨, 이인좌의 잔당인 소론붙이들이 세자를 에워싸고 영조가 죽기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세자를 모함하는 노론의 짓이었다. 평소 세자가 장차 보위에 오르면 노론의 무리들을 없애리라고 호언하는 바람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선수를 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이다. 중전은 이 벽서는 노론의 일파에서 임금과 세자를 이간질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라 생각하고 분노한 임금을 달랬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노론의 거두 영의정 김재로와 좌의정 조현명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빚어진 일이라고 사의를 표했으나 영조는 이를 묵살했다.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것은 과인의 덕이 없는 소치이니 과연 세자 말대로로다. 세자에게 신위함이 어떨까?"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노론들은 이제 세자에게 숙청을 당해 삭탈관직은 물론 언제 죽게 될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전전긍긍하였다. 중전은 어린 세자가 대리청정을 잘 해 나갈지 의문스러워 세자의 대리청정을 거두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영조는 이를 일축해 버렸다.

"태평성대가 못 됨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 임금의 책임이라 했으니, 이제부터 세자가 대리청정케 되었으니 태평성대를 누리지 않겠소?"

"마마, 어린 세자가 철없이 한 말을 섭섭하게 생각하시면...."

"임금 노릇이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지 세자도 곧 깨달을 것이오."

그러나 영조는 한편으로 세자가 총명하여 대리청정을 잘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세자는 마치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불안하여 짜증만 늘 솟구쳐 그 불만을 가까이 있는 궁녀들에게 터뜨렸다. 세자빈 홍씨는 세자의 비위를 맞추고 위로하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세자는 세자빈에게 푸념했다.

"빈궁, 이러다가 내가 미쳐 버리고 말겠소."

"저하, 꾹 참고 견디셔야 합니다."

세자빈 홍씨는 영조와 세자 부자 간에 반목하는 사이에서 임금에게는 효성스런 며느리로, 남편 세자에게는 착한 아내가 되어야 했으니 그녀는 몹시 괴로웠다.

그런 세자빈에게 경사가 생겼다. 홍씨의 몸에 태기가 있어 8월에는 마침재 첫 아들을 낳았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있는 왕실의 경사로 16년 전 영빈 이씨가 세자를 낳은 뒤로 최초로 얻는 왕손이었다. 영조는 왕손의 탄생을 경축하여 삼청궁 옥청에 구금된 죄인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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