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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정조실록

by 무님 20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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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은 조선왕조 제22대 왕이었던 정조의 재위 기간인 1776년 3월에서 1800년 6월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조의 본디 묘호는 정종이었으므로 그 실록의 본디 이름도 <정종무성무열성인장효대왕실록>으로 약칭<정종대왕실록>이라 하였다.

광무 3년인 1899년에 묘호를 추종 개정함으로써 그 실록도 <정조실록>으로 부르게 되었다. 본서 54권과 부록 2권을 합쳐 모두 56권 56책이며, 활자로 간행되었다. <정조실록>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익년인 순조 즉위년인 1800년 12월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순조 5년인 1805년 8월에 완성하였다. 정조 대에는 정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실록 편찬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며 그 편찬 경위도 다른 실록의 편찬 사례와 대체로 같았다. 실록청 총재관에는 이병모. 이시수. 서용보.서매수 등 4명이 임명되어 편찬을 주도하였다. 

정조는 100년 6월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존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이며, 능호는 건릉으로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서쪽에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로 개칭되었다.

 

정 조

 

 

* <정조실록>의 내용

정조는 영조 28년인 1752년에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영조 35년인 1759년 8살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영조 38년인 1762년에 장헌세자가 죽음을 당하자, 정조는 어려서 죽은 영조으 맏아들 효자세자의 아들로 이적되었다.

정조는 친아버니의 죽음과 시파. 벽파의 대립 갈등으로 그 지위가 매우 위태로웠으나, 홍국영 등의 보호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영조 51년인 1775년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 해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25세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곧 규장각을 설치해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였다. 정조는 영조 이래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는 유능한 학자와 관료들을 우대하고 젊은 문신들을 선발하여 학문과 문예를 장려함으로써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그의 묘를 수원 화산 라래로 이장하여 현륭원을 조성하였다. 현륭원 조성 때문에 수원을 팔달산 기슭으로 옮겨 신도시를 건설하게 되었다.

17세기부터 조선에는 천주교가 들어오게 되었고, 권철신. 정약용 형제, 이벽 등과 같은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정조 7년은 1783에는 이승훈이 북경 천주교 회당에서 영세를 받았고 다음 해에는 서울 남부 명례동 역과 김범우의 집에 최초의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정조 15년인 1791년에는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의 윤지충. 권상연 등의 사건이 있었고,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여 활동하였다. 정조는 천주교를 금지하기는 하였지만 심하게 단속하지 않았으므로 1800년경에는 신도가 1만여 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 정조의 태실이야기

 

22대 임금 정조 태실은 영월군 하동면 정양리 태봉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도 태봉 기슭에는 태석 일부가 매몰되어 있다.

정조의 태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어태를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가면서 정조 태실의 석물은 방치됐다. 이후 정조의 태실은 여느 태실처럼 무참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더구나 이곳에 1936년 영월화력발전소가 건립되면서 태봉의 일부가 깎여 사라졌다. 태실의 동편에 위치해 태봉의 안위와 수호 역할을 맡던 수호사찰 정양사는 없어졌고, 태봉 아래 정양리 주민들도 산지사방으로 대부분 흩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에는 석회비료 광산의 개발로 더욱 파괴되고 매몰됐다.

 

 

정조의 태지, 태호

 

1967년 영월군 종합개발위원회가 석물과 태실비를 수습하고 태석들을 거두어들였다. 영월읍 금강공원으로 옮겨져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1995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14호로 지정됐다. 외항아리에는 C자형 고리가 4개 달려있는데, 고리와 접합부분을 눌러서 처리했다. 외항아리 뚜껑 상면에 2줄의 음각선이 들어가 있다. 내항아리와 외항아리는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태실비의 명문을 살펴보면,

'아지비'는 <後面 : 乾隆十八年正月二十一日立>

(후면 : 건륭십팔년정월이십일일립.)

'가봉비'는 <前面 : 正宗王胎室, 後面 : 嘉慶六年十月二十七日建>

(전면 : 정종왕태실, 후면 : 가경육년십월이십칠일건)

으로 아지태실의 조성은 영조 29년(1753)에 있었고, 태실의 가봉은 순조 원년(1881)에 이루어졌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고종 34년 (1899년)에 정종이라는 묘호를 정조의황제(正祖宜皇帝)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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