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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조선시대 왕들의 정원 < 창덕궁 후원 >

by 무님 2020.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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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무님의 여행이야기> 창덕궁 후원을 소개합니다.

창덕궁 후원은 왕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비원이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후원은 궁궐의 정원이라는 뜻에서 금원(), 궁궐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원(), 또 뒤쪽에 위치한 정원이라는 뜻에서 후원이라 불러왔다. 후원은 엄밀히 말해 창덕궁의 후원이지만 이 후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창덕궁과 창경궁의 뒤쪽이 되어 자연히 두 궁궐에서 공유하고 있다.

 

 

후원의 부용지

 

 

 

후원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인 태종 때부터이다. 《왕조실록》 태종 6년(1406) 4월에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慍亭)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온정 앞에는 연못이 있어 잔치를 벌이고 등() 놀이를 하였는데, 태종 14년(1414)에 신독정()이라 이름을 고쳤다. 태종 6년(1406) 5월 27일에는 인소전(仁昭殿)을 짓고 같은 해 8월 태조()의 두 번째 정비인 신의왕후()의 신위를 이곳에 모셨다. 2년 뒤에 문소전(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조실록》 5년(1459) 9월 26일 자에 후원 좌우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과 7년(1461) 11월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열무정은 세조 5년에 연못가에 세운 정자라 생각된다. 그리고 예종 때에는 후원에서 적을 뒤쫓아 공격하는 군사훈련인 습진()이 행해져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 《궁궐지》에는 열무정 북쪽에 사정기()를 쓴 비석이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 부용정() 북쪽에 있는 부용지의 서쪽에 마니(), 파리(), 유리(), 옥정() 4개 샘의 유래를 기록한 사정 비각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열무정은 이 언저리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세조 8년(1462) 정월 동쪽 담장을 더 바깥쪽으로 쌓기 위하여 그 안쪽에 있던 집 73채를 헐고, 둘레 4천2백 자(약 1,272m)로 새 담장을 쌓았으며, 세조 9년(1463)에는 북쪽으로도 58채의 집을 헐고 새 담장을 쌓아 지금의 성균관에 가깝게 한 확장공사가 있었다.
성종 8년(1477) 3월 3일 선공감에 명하여 후원에 채상단()을 쌓고 왕비가 양잠을 장려하였으니, 이는 후일 1911년 주합루 서향각()에 양잠소를 만들게 한 것과 통하는 일이다.
연산군 때에는 후원에서 난잡한 놀이가 행해지는 등 많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는데, 연산군 3년(1497) 초 서쪽 담장을 높게 쌓아 궁담 바깥의 백성들이 궁담 안에서 벌어지는 난잡한 놀이를 보지 못하게 하였고, 더구나 9년에는 동쪽과 서쪽 궁담 아래의 민가들까지도 철거하였으며, 10년(1504)에는 성균관이 가깝다 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까지 하였다.
연산군 11년(1505)에 짓게 한 서총대(瑞葱臺)는 1천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이로, 돌을 10자 높이로 쌓고 돌난간을 두르게 하고, 대 앞에 큰 연못을 파게 하여 양쪽에서 배를 띄우도록 하였는데, 이 공사에 동원된 감독만 9백 명이고 일꾼들은 수만 명에 달하였으나, 다행히 연산군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어 공사는 중단되고, 그동안 건설되었던 시설은 중종 때 모두 철거되었다.
선조 7년(1574) 8월 9일에는 후원 정자 2간을 증축하였는데, 후원에서 여염집이 내려다보일 지경이어서 대간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또 16년(1583) 9월 8일에 말을 달려 기사를 시험하게 하도록 길을 만들라 하였는데, 이도 선대에 없는 일이라 대간들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 기록에서 후원을 금원()이라 하였다.

 

 

 

 

 

후원으로 오르는 길은 성정각 일원에서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따라 올라가면 왕실 정원의 초입부인 부용지에
이른다.  <부용지>에는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평(약 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은 연못에 피어 있는 한송이 꽃의 형상으로 2012년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었다.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주합루도 2012년 보물 제1769호로 지정되었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이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생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부용지>을 지나 걷다 보면 금마문이 나온다. 이곳에는 기오헌이 자리하고 있는데 <기오헌>은 효명세자의 독서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집의 방향은 독특하게 북향으로 현재‘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 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기오헌을 걸어나 오면 <불로문>과 애련지를 볼 수 있다. 군자의 성품을 닮은 경치라 표현되는 곳이다. <애련지>1692년(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후원에는 필자가 좋아하는 효명세자와 관련된 곳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곳은 연경당이다. 연경당(演慶堂)(보물:1770호)과 선향재(善香齋)로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 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연경당은 2012년 보물제 1770호로 지정되었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권력을 이어받아 세자로 실제 임금으로 등극하여 실권자로서 대리 청정도 하지만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 슬픔 세자이기도 하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왕의 대리인으로 아버지 순종의 방패 역할과 왕권을 회복하려 하였지만 그 뜻을 펼치지도 못 한 체 떠나간 순조가 너무도 사랑했던 아들이라 할 수 있다. 

 

<존덕정과 펌우사>는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다. 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존덕정과 펌우사를 지나 숲길을 걷다 보면 옥류천이 나온다. <옥류천>은 다양한 각도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漪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 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옥류천을 마지막으로 왕들의 정원을 내려온다. 어느 곳보다 효명세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후원은 필자에게 더 아름답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짧은 생을 누구보다 찬란하고 멋지게 왕으로 살았던 나의 아름다운 왕. 효명세자를 가슴에  담아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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