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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서애 류성룡의 < 병산서원 >

by 무님 2020.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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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무님의 여행이야기> 이번은 안동의 병산서원을 소개해 본다. 병산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한국의 서원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병산 서원은 1572년 선조 5년에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서애 류성룡과 그의 아들인 류진이 배향되어 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총책임자를 맡아 승리로 이끌었으며 후에 <징비록>이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다.

 

병산서원

 

 

일반적으로 서원건축은 교학(敎學)을 위한 강학 건물과 제향(祭享) 공간인 사당, 부속시설 이렇게 세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병산서원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강학건물군 : 복례문, 만대루, 동서재, 입교당, 장판각
  2. 제향건물군 : 신문, 존덕사, 전사청
  3. 부속시설군 : 주소(庫直舍), 달팽이 뒷간, 광영지, 기타

 

병산서원의 입구인 <복례문>은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한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유학의 자기 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원래는 지금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입교당 중건 일기(1921)」에 의하면 서원의 측면인 만대루 동편에 있었던 것을 이건한 것이라 한다. 병산의 험한 형세를 피하고자 했던 풍수 원리가 담겨있었다.  복례문을 지나면 바로 만대루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만대루>는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팔작 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이 웅장한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 건축과 자연 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 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 만대 백곡 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말이다.
-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복례문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에는 광명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광명지>는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꾸어 놓아 그 형태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 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만대루의 누각 밑을 니나 계단을 오르면 정명으로 입교당과 양옆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 서재>는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었다. 강당 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 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 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입교당에 올라 바라보는 만대루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여유롭게 만들어 준단다. <입교당>은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이다.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렸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으로 가구는 5량(樑)이다. 강학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 세 부분으로 나뉜다. 양쪽 방에는 온돌을 들이고 중앙의 강학당은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툇마루가 마련된 명성재에는 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는 이른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입교당 옆으로 도라 서면 진청사와 삼례문을 볼 수 있다. <진청사>는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존덕사를 들어가는 문이 삼례문인데 이를 신문이라고도 한다. <신문>은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향사례에서 신문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된다. 집례를 맡은 임원들은 신문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일반 학생들은 앞마당에서 참관하여야 한다. 신문 안으로 있는 <존덕사>는 서원에서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서애 선생과 수암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며 풍판이 설치된 맞배지붕 건물이다. 변형된 익공(翼工)양식의 겹처마로 단청이 되어 있으며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답사기 3>에 병산서원에 대한 글귀를 옮겨 본다.

'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을 배경으로 하여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이 빼어난 강산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했다는 점에서 건축적, 원림적 사고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병산서원이 낙동강 백사장과 병산을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병산서원의 정원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를 건축적으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를 해야 이 자연공간이 건축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인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 만대루이다.

만대루에 중심을 두는 건물 배치는 건물의 레벨 선정에서도 완연히 나타난다. 병산서원이 올라앉은 뒷산은 화산이다. 이 화산의 낮은 구릉을 타고 레벨이 올라간다. 하지만 단조로운 기하학적 수치의 증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공간 운영을 자세히 따져보면, 사당은 위로 추켜올리듯 모셔 있는데, 만대루 누마루는 앞마당에서 볼 때는 위쪽으로, 그러나 강당에서 볼 때는 한참 내려보게 레벨이 잡힌 것이다. 사당은 상주 상용 공간이 아니고 일종의 권위의 상징 공간이니 다소 과장된 모습을 취했지만 만대루는 정반대로 봄부터 가을까지 상용하는 공간이므로 그 기능을 최대한 살려낸 것이다. 만대루로 오르는 통나무 계단은 그 자체가 감동적이다. '

이 글보다 병산서원을 표현하기에 더 좋은 글은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병산서원의 입교당에 앉아 바라보는 만대루의 모습은 시간을 잊게 한다. 만대루 넘어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의 모습은 

<영 가지>의 지도에 '청천 절벽'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고 한다.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서원 마당 곳곳에 심어져 있는 배롱나무는 한 여름 꽃을 볼 수 없는 지금도 부족함이 없는 경관을 자랑한다.

지금은 후손들이 살며 관리되고 있지만 그래도 필자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있던 당시의 모습을 마음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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