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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중종의주요정책과 사건과 중종의 묘

by 무님 202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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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재위기간은 재위기간은 38년 2개월이 였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반정의 훈구세력들이 강압은 거침이 없었다. 중종이 사랑한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를 시킬만큼 반정 신하들의 강압적 자신들의 뜻대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되는 해인 1515년(중종 10),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중용하여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일파를 등용한 초기에는 미신 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향촌에 향약(鄕約)의 실시를 권장하였다. 재위 후기에는 군적(軍籍)의 개편과 전라도ㆍ강원도ㆍ평안도에 대한 양전(量田, 토지조사)을 실시하였으며, ▲진(鎭)의 설치 ▲성곽의 보수 ▲평안도 여연ㆍ무창 등지의 야인을 추방하는 등 국방정책에도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대량의 활자를 만들었고, 지방의 사실(史實)을 기록하기 위하여 1515년 외사관(外史官)을 임명하였으며, 1540년(중종35) 역대 실록의 등사(謄寫)를 완료해 사고(史庫)에 비치하는 업적을 이뤄냈다.

 

 

1. 기묘사화(, 1519)

1519년(중종14) 남곤·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조광조 등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면서 훈구파의 반발을 일으켰다. 특히 이들은 중종반정 때 참가하지도 않고 부당하게 공신이 된 사람들을 모두 가려내어 76명을 공신록에서 지워버리는 이른바 위훈삭제운동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훈구세력의 불만은 폭발하였고, 홍경주·남곤 등은 1519년 11월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며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하는 계를 올렸다. 당시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 에 이들의 상계를 받아들여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숙청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묘사화다. 이 기묘사화로 인해 사림세력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였다.

 

2. 주초위왕()
기묘사화와 관련해 사건의 전개 과정에 이른바 「주초위왕()」이라는 술수가 활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곤을 비롯한 공신세력들은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2자를 합치면 조()자가 되기 때문에,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여기서 조씨는 조광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 및 사림세력을 발탁했던 중종 역시 마음을 돌리게 되면서 기묘사화가 발발하게 된다.

 

3. 삼포왜란( 1510)

1510년(중종5)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三浦)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난이다. 이전까지 면세 등 다양한 혜택을 받아왔던 왜인들은 중종의 엄격한 법규 시행에 따라 경제활동이 위축되자, 대마도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 살해되는 등 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자, 조정에서는 즉시 황형을 좌도방어사로, 유담년을 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의 폭동을 진압하였다. 진압 이후에는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진휼하는 한편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왜인들을 추방하였다. 이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겼으며, 이러한 상황은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해 국교를 다시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4. 조광조(, 1482∼1519)

1515년(중종10년) 34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중앙 조정에 등장한 조광조는 38살 때 대사헌의 벼슬에 오르는 등 조선 역사에서 유례 없이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누적된 여러 현안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혁하려고 시도했으나,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훈구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다 이들이 실시한 현량과(賢良科)와 정국공신의 삭훈(削勳, 공적을 깎음)이 정국공신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의 불만을 폭발시켰고, 이는 1519년(중종14년) 11월 기묘사화로 이어진다.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들이 일거에 숙청됐으며,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서 한달 뒤 사사됐다.

 

5.현량과()
조선 중종 때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시행된 관리등용제도이다. 사장()에만 치중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한 뒤 대책만 시험해 선발했다. 현량과는 1519년 4월 13일에 시행되어 김식 등 28명이 선발되었지만 모두 기묘사림의 일원들이 뽑힘으로써 훈구파의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기묘사화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소학()》 《이륜행실()》 《경국대전()》 《대전속록()》 《천하여지도(輿)》 《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輿)》 《이문속집집람()》 《대동연주시격()》 등 다방면에 걸친 문헌이 편찬 ·간행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이와 같은 문화발전을 위한 정책은 거의 정지되었다. 다만, 치세 말기에 군적()의 개편과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에 대한 양전()을 실시하였으며, 진()을 설치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한편, 평안도 여연() ·무창() 등지의 야인을 추방하는 등 국방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조하고, 지방의 사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외사관()을 임명하였으며, 1540년(중종 35) 역대 실록()을 인쇄하여 이를 사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중종의 치세에서 처음에는 어진 정치를 펴는 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 이후 간신()들이 판을 치는 통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여 볼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중종의 정릉

 

조선 제11대 왕 중종(  1488~1544, 재위 1506∼1544)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선릉(;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과 함께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1545년(인종 1) 서삼릉(西,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능역에 있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 언덕에 왕릉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 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정릉은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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