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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인종, 명종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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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백령 - 조선 전기 해남 출신의 문신이다.

임백령의 본관은 선산()이며 자는 인순()이며 호는 괴마()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동복현감을 지낸 임간(), 증조할아버지는 증 이조참의 임득무(), 할아버지는 진안현감을 지낸 임수()이다. 아버지는 임우형()이고 어머니는 참봉 박자회()의 딸 음성박씨()이다. 형은 임천령()·임만령()·임억령(), 동생은 임구령()이다.

임백령은 1498년(연산군 4) 해남에서 태어나 박상()의 문인이 되었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갑과 3등으로 급제하여 상서원직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예문관검열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저작으로 전임하였다. 1527년(중종 22)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를 역임하고 영광군수로 부임했으며, 1532년(중종 27) 사헌부 장령·집의를 거쳐 1537년(중종 32)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또한 이듬해인 1538년(중종 33) 공조참판·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 등을 거쳐 1544년(중종 39)에는 대사헌·호조판서가 되었다.
임백령은 1545년 윤원형()·이기() 등과 모의해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사사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 사건을 주도한 공로로 정난위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에 봉해졌으며, 보국숭록대부에까지 올랐다. 임백령은 우찬성의 지위로 사은사에 선발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1546년(명종 1) 귀국 도중 병들어 사망하였다. 임백령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부록산에 있다.

임백령이 죽은 후 조정에서는 소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문정왕후가 좋지 않다고 하여 문충()으로 고쳤다. 1570년(선조 3)에 이르러 을사간당으로 몰려 훈작이 삭탈되었다.

 

 

 

 

2. 정순붕 - 조선전기 대사헌, 의정부우찬성,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온양(). 자는 이령(), 호는 성재(). 정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평 정충기()이고, 아버지는 헌납 정탁()이며, 어머니는 도진손()의 딸이다. 형조판서 정백붕()의 아우이다.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림과 교유하였다. 1516년(중종 11)조광조()·박상()·김정() 등과 더불어 사유()로 선발되고, 이어 이조판서 송천희()의 천거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1518년에는 김정국()·신광한() 등과 함께 경연강독관()으로 선발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참의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이 일망타진되면서 이에 연루, 전주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1520년 파면되고, 이듬해 관직이 삭탈되었다.

1531년 이래 영의정 정광필() 등에 의해 등용이 논의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김안로() 일당이 제거되어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이 모두 풀려나면서 등용되었다.

1539년 공조참판에 제수되어 곧 명나라에 다녀와 명나라에서 구한 『황명정요()』·『요동지()』 6권을 나라에 바쳤다. 이어서 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다시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한성부우윤으로 옮겼다가 1542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 곧 호조판서로서 오랫동안 국가 재정을 주관하였다.

1544년 의정부우참찬으로서 내의원제조(調)를 겸임하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면서 의정부우참찬에서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이기()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켰는데, 그는 이기 등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귀양보내니 사람들은 그를 이기 등과 더불어 간흉이라 하였다.

대개 사람이 악을 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시기하고 음험하여 남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는 악에 강한 자로서 이기와 같은 예이며, 그것이 악인 줄 알면서도 위력에 겁을 내어 악을 행하는 자는 악에 유()한 자이니, 곧 정순붕의 경우이다. 이로 인하여 보익공신() 1등에 책록되고 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관직은 의정부우찬성에 오르고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을사사화의 공로로 유관()의 가족들을 적몰하여 자기의 노비로 삼았는데, 그 중 갑이()라는 여종이 주인 유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염병을 전염시켜 죽게 했다 한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1578년(선조 11) 관직과 훈작이 모두 삭탈되었다.

 

 

3. 정언각 - 1498(연산군 4)∼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근부(). 정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연경()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희검()이며, 어머니는 신승준()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537년 박사에 이어 정언·지평·장령·교리·응교·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옹원정·검상·사인 등을 지냈고,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시 양재역()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자행()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 이기·정순붕() 등에게 알림으로써 벽서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을사사화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봉성군(: 중종의 아들)·송인수()·이약빙() 등을 죽이고, 권벌()·이언적() 등 20여명을 유배시킴으로써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그 권세를 빌려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도승지·판결사를 거쳐 1551년 전라도관찰사로서 이열()의 노비를 약탈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1555년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등용, 성절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56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사고로 죽었다. 1570년(선조 3) 관작이 추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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