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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인종, 명종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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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기 - 조선전기 좌찬성,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덕수()이다. 자는 문중(), 호는 경재(). 이명신()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이다. 아버지는 사간 이의무()이며, 어머니는 성희()의 딸이다. 좌의정 이행()의 형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삼등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장인인 군수 김진()이 장리(: 부정하게 뇌물을 받거나 직권으로 재물을 탐한 죄를 저지른 관리)였기 때문에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고, 종사관·종성부사·경원부사·의주목사로 전전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승진했지만, 삼사를 비롯한 철요의 직책이나 6경 등 서경()을 필요로 하는 지위에는 나가지 못했다. 1522년(중종 17) 공조참의를 지내고, 이어서 함경도병마절도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27년 한성부우윤이 되어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면서 민정과 국방에 이바지했다. 1533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어서 예조참판·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1539년 진하사(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동안 지은 공로로 국왕이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했으나, 이조판서 유관()이 장리의 사위로서 서경을 받을 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유관은 나중에 보복을 당했다.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의 주장으로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

1543년 의정부우찬성에 이어 좌찬성·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윤임() 등이 부적합하다고 탄핵하여 판중추부사·병조판서로 강등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명종이 즉위해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자,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 때 윤임·유관 등을 제거하고,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547년(명종 2) 윤원형·윤인경() 등과 더불어 양재역벽서사건()[일명 정미사화()]를 일으켜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정자()·노수신()·정황()·유희춘()·백인걸()·김만상()·권응정()·권응창()·이천계() 등 사림파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대광보국숭록대부(祿)가 되면서 병조판서를 겸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풍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1549년(명종 4) 영의정에 올랐다. 이기를 반대한 사림은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죽은 뒤 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이기가 받은 훈록은 선조 초년에 모두 삭탈되었다.

 

 

경주 옥산서원

 

 

2. 이언적 - 조선전기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강(: 여주()). 초명은 이적()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 호는 회재()·자계옹(). 회재라는 호는 회암(: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이수회()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번()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로 계천군() 손소()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주었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는 이언적이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이언적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이언적은 1517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이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과 이기불상잡설()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은 이황()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이언적은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1550)·『대학장구보유()』(1549)·『중용구경연의()』(1553)·『봉선잡의()』(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인()에 대한 이언적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이언적은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통해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이언적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보여준다. 이언적은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고,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언적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 도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비해 훨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미완성 저술로 주희의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인 9경(: 수신()·존현()·친친()·경대신()·체군신()·자서민()·내백공()·유원인()·회제후())을 중심으로 『중용』의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는 진덕수()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하며, 후에 이현일()이 『홍범연의()』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와 치인()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이언적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언적이 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의 마음씀[]’을 근본 강령으로 규정하고,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1517년 저술한 「오잠()」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 마음을 배양함[], 공경하는 마음[], 허물을 고침[], 의지를 독실하게 함[]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이언적은 하늘[·]과 백성[]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1569년(선조 2) 종묘()의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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