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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

고려왕조실록 - 혜종 실록

by 무님 202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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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은 고려전기 제2대(재위:943~945) 왕이다.

자는 승건(), 휘()는 무(), 시호는 의공()이다. 태조 왕건()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이며, 비()는 대광() 임희()의 딸인 의화왕후()이다. 태조는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하고 그곳에 주둔할 때, 오씨를 만나 혼인하였다. 나주 오씨 집안의 세력은 권력이나 군사력을 갖지 못했으며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혜종은 후에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왕건은 장남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고 싶었으나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입장이었기에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은 왕자 무의 어머니 오씨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의 뜻을 알아차린 대광(재상) 박술희는 마침내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역설하며 왕자 무를 태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 한다.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921년에 박술희()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된다. 그리고 진천 임씨 집안에서 태자빈을 맞아들였다. 또한 경기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던 왕규의 딸을 태자의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한편, 청주 김긍률의 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충주 유씨 세력을 견제한다.

 

943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 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왕건은 즉위 직후 북진정책을 감행하기 위해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는데, 이 때문에 서경은 개경과 더불어 고려의 가장 주요한 지역으로 부상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서경을 중심으로 일단의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 '서경세력'의 중심엔 평산 박씨와 왕식렴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한편, 이복동생인 왕요(: 뒤의 )는 서경(西: 지금의 )의 왕식렴() 세력과 결탁해 은근히 왕위를 엿보았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었다.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백여 명을 죽였다. 이 무렵 박술희도 갑곶(: )에 유배된 뒤 살해되었는데, 왕요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평판 박씨가 서경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함에 따라 그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충주 유씨의 힘은 더욱 커진다. 왕건이 죽자 이들과 힘을 합쳐 혜종을 위협하게 된다.

 

혜종이 죽자 왕요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혜종의 죽은 원인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 견해가 있다. 능은 순릉()이며, 시호는 의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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