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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단종, 세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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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징옥 - 조선전기 회령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평안도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양산(). 호는 원봉(). 아버지는 지중추원사 이전생()이며, 이징석()의 아우이다.

어려서부터 순직하고 무용이 뛰어났다. 어머니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다고 하자 형 이징석()과 같이 사냥을 나갔다. 이징석은 그날로 멧돼지를 활로 쏘아 죽여서 잡아왔지만 이징옥은 이틀이나 힘들게 몰이를 해서 기진맥진한 멧돼지를 산 채로 끌고 왔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징석과는 성격이 대조적임을 잘 보여준다.

갑사()로서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가, 1416년(태종 16) 부사직으로 무과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사복소윤()에 제수되었다. 1423년(세종 5) 황상()의 천거로 경원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하고,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이 때부터 1430년까지 여진이 침입하여 노략질할 때마다 변방의 방비에 공을 크게 세우자, 세종이 9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보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얼마 동안 고향인 양산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다가 143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영북진절제사(使)를 거쳐 1436년 회령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판경흥도호부사로 전직하면서 함길도도절제사인 김종서()와 같이 4진의 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2년만에 방위와 경영의 포치()를 완성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해 조선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그는 동북 변경의 개척 초창기에 제일선에 배치되어 야인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데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1435년을 고비로 4진이 안정되면서부터 대여진정책이 유화 내지 동화로 기울어져 1438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경원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함경도를 떠났다. 그 뒤 100일 만에 기복되어 다시 경상도·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맡았다.

1449년 20여 년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회유·복속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야선()의 침입에 대비해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 10년 만에 다시 북방의 방위에 임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집권한 뒤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하자, 후임자인 박호문()을 죽인 뒤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라 자칭, 도읍을 오국성()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서 밤을 새울 때 종성판관 정종()·이행검() 등의 습격을 받아 아들 3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 난은 1402년 11월의 조사의()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서, 후일 이시애()의 난의 선구가 되었다. 특히, 사대사상에 젖었던 당시 조선인으로서 황제를 칭한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이징옥의 난

 

2. 정창손 - 선전기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동래(). 자는 효중(). 정양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정부()이고, 아버지는 중추원사(使) 정흠지()이며, 어머니는 최병례()의 딸이다. 좌참찬 정갑손()의 아우이다.

1423년(세종 5) 사마시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집현전의 저작랑과 교리를 역임하면서 『통감훈의()』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1441년 사섬서령()으로 전임하였다. 1443년 집현전응교가 되었는데 재직중인 이듬해 한글의 제정을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

같은 해 풀려 나와 응교로 복직된 뒤 1445년 집의가 되었는데, 이듬해 세종이 불경()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의 불교 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 이듬해 용서를 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부제학이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번 왕실의 불교 숭상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과 수사관()을 겸직하면서 『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를 거쳐 1451년(문종 1) 대사헌이 되었는데, 조정의 관원들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을 일삼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 제학·대제학·병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외척 홍원용()과의 상피관계()로 사헌부에서 피혐하기를 주장했으나 왕명으로 피혐되지 않았다. 1455년(세조 1) 우찬성으로 세자좌빈객()과 판이조사를 겸했으며, 좌익공신()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위 김질()이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했는데, 일이 여의치 않자 질이 이 사실을 자신에게 폭로함에 이를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이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서 1자급을 올려 2등 수충경절좌익공신()이 되고 보국숭록대부(祿)가 더해졌으며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어 대사성·대제학을 겸직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이러한 처사로 절의를 숭상하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 등으로부터 많은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세조로부터는 대단한 신임을 얻어 1457년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을 하자 세조는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를 내렸으며, 여묘()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기복(: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에 있는 대신을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시켜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에 여러 번 소를 올려 이를 사양했으나 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462년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말했다가 삭직되고 여산()에 부처()되었으나, 곧 용서받고 봉원부원군()에 복작()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와 강순()의 옥사를 잘 다스려 익대공신() 3등에 올랐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대광보국숭록대부(祿)로 승품되고 원상()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이 되어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이 하사되었다. 1456년(세조 2)에 죽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한편, 남효온()이 소를 올려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했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 일로 지탄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이듬해 왕이 왕비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번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나이 84세에 영의정으로 재임된 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487년 86세로 죽자 왕은 청빈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그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의 생모를 폐출하는 논의에 참여한 죄로 윤필상()·한치형()·한명회()·어세겸()·심회()·이파()·김승경()·이세좌()·권주()·이극균()·성준() 등과 함께 십이간()으로 몰려 부관참시()되었다.

그러나 1506년(중종 1)에 신원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부관참시 때 철거한 석물을 다시 세우고 예로써 개장()하였다. 박학강기()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이다.

 

 

3. 하위지 - 조선전기 집현전부제학, 예조참판, 세자우부빈객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단종을 위해 사절()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본관은 진주(). 자는 천장()·중장(), 호는 단계()·적촌(). 선산 출신. 하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하지백()이고, 아버지는 군수 하담()이며, 어머니는 유면()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전지()를 내렸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의 상정()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과 정창손()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그 해 『역대병요()』와 병서()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의 신분으로 사은()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의 온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 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육조직계제()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대해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을 받게 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 등이 당한 작형(: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하호()와 하박()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하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뒤에 남효온()은 『추강집()』의 <육신전 >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사(), 선산의 월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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