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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삼전도의굴욕 - 인조의 굴욕과 나라의 슬픔

by 무님 2020.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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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의 주장대로 군신 관계를 수립하고, 두 왕자와 강경한 척화론자들(홍익한, 윤집, 오달제 - 삼학사)가 인질로 잡혀가게 되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호란의 영향으로는 청의 침입로였던 서북 지방이 황폐화되었고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 우월감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1) 최명길의 주화론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들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늘 생각해 보아도 우리의 국력은 현재 바닥나 있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성합니다. 정묘년(1627)의 맹약을 아직 지켜서 몇 년이라도 화를 늦추시고, 그동안을 이용하여 인정을 베풀어서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으며, 군량을 저축하여 방어를 더욱 튼튼하게 하되 군사를 집합시켜 일사불란하게 하여 적의 허점을 노리는 것이 우리로서는 최상의 계책일 것입니다.

2) 윤집의 척화론

화의로 백성과 나라를 망치기가··· 오늘날과 같이 심한 적이 없습니다. 중국(명)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 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어서 부모를 저버리겠습니까. 하물며 임진왜란의 일은 터럭만 한 것도 황제의 힘이어서 우리 나라가 살아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어찌 이런 시기에 다시 화의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삼전도 ( 잊지말야 할 교훈 )

 

1637년 1월 26일에 청군은 자신들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그곳에 피난한 비빈과 왕자, 종실, 신료의 가족 등을 포로로 잡았음을 조선측에 알리고 출성항복을 촉구하였다. 출성항복 여부를 두고 성안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청군은 포위망을 강화하고 공성기구를 배치한 채 28일까지 여전히 포격만을 가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악화되어 가자 조선의 조정은 최후까지 항전하려던 방침을 포기하고 국왕의 출성항복을 결정하였으며 이를 청군 진영에 통고하였다.

 

' 30일 해도 빛을 잃었다. 임금(인조)이 세자와 함께 푸른 옷을 입으시고 서문으로 나가셨다. 성에 있던 사람들이 통곡하니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한(, 청태종)이 황금으로 된 의자 위에 걸터앉아 전하로 하여금 걸어서 들어오게 하시니 (인조는) 백 보는 걸어 들어가셔서 따라온 신하들과 함께 뜰 안 진흙 위에서 배례를 하셨다. 신하들이 돗자리 깔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황제 앞에서 어찌 감히 자신을 높이리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시고 성에 오르셔서 서쪽을 향하여 제단 위에 앉으셨다. 한은 남쪽을 향하여 술과 안주를 차려놓고 군악대에게 연주하게 하고 전하께 담비 가죽옷 두 벌을 내리고 신하들에게 각각 한 벌씩 주었다. 임금이 한 벌을 입으시고 뜰에서 세 번 절하여 사례하시니 신하들은 네 번 절하여 사례하였다. [산성일기] '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로 향하였다.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고도 칭해진다. 무릎 1번 꿇을 때마다 3번 조아려서 총 9번.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절하면서 머리를 바닥에 마구 찧어 이마 빡에서 피가 흘렀다거나, 인조가 머리를 찧는 소리가 단 위의 청 태종에게 제대로 들릴 때까지 절을 계속했다.

 

< 장수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 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

 

< 용골대 등이 상(上)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 :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 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나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삼전도는 1439년(세종 21)에 신설된 나루로, 도성()의 중심지로부터 30리 지점, 상류의 광나루[]와 하류의 중랑포() 사이에 있었다. 서울에서 지금의 성동구 왕십리와 뚝섬 사이 살곶이다리[]를 지나, 신천동()과 잠실동이 있는 하중도()를 건너 송파에 이르도록 뱃길이 마련되었다. 당시 서울과 광주의 남한산성을 이어주는 나루로서, 종9품의 도승()을 두어 이를 관리하였다. 이곳은 서울에서 광주, 이천, 여주로 나가는 지름길로 중요한 교통로로 역할하였다. 그리고 세종 때에는 대모산 아래 현릉으로 가기 위한 길로 이용되었다. 이 지역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함락으로 인조가 청군()에게 항복을 한 곳으로 청나라 황제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에 삼전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인조의 간곡한 부탁에 이경석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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