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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집현전 학자 박팽년

by 무님 2020.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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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은 조선전기 충청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 회덕() 출신. 박원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안생()이고, 아버지는 박중림()이며, 어머니는 김익생()의 딸이다.

 

박팽년은 과묵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성품은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 책에 나오는 예절대로 실천하여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의관을 벗지 않아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 하나가 있다. 명의 천순() 황제가 오랑캐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박팽년은 침실에서 자지 않고 항상 밖에서 짚자리를 깔고 잤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천자가 오랑캐 나라에 잡혀 있으니 내가 비록 배신()이기는 하나, 차마 마음 편하게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고지식한 사람이라 평가할 수 있으나, 이러한 충절심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케 하던 휴가 제도)를 하였다.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박팽년은 집현전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도 학문과 문장·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집현전 출신인 신숙주ㆍ최항ㆍ이석형ㆍ정인지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 등 쟁쟁하게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성삼문은 문체는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짧고, 하위지는 대책()과 소장()에는 능했으나 시를 알지 못하고, 유성원은 타고난 재주가 숙성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으며 시도 뛰어나게 맑았으나 모든 사람들이 박팽년을 추앙하여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집대성()이라 하였다. 시를 비롯하여 경학ㆍ문장ㆍ필법 등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했던 박팽년이었지만, 참화()를 입어서 저술이 전하지 않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최항()·유성원()·이개()·하위지()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이름높은 선비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술()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와 왕희지()에 버금간다 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으며,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질()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으로 성승()·유응부·박쟁()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해 뒷날 관가(: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박팽년은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박팽년은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하고 상감(: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박팽년은 “나는 상왕(: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박팽년은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자신의 아버지 박중림이라 대답하였다.

 

한번은 옥중에서 고문을 당할 때 세조가 사육신들에게 술을 따르며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하여가’를 읊어 시험하였다. 성삼문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를 지어서 답하였다. 박팽년의 충절을 느낄 수 있는 유명한 두 작품이 있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금이 아름다운 물에서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는 것은 아니며,
옥이 곤강(崑崗)에서 나온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여자가 사랑하는 지아비를 따른다고 하지만 임마다 좇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 박팽년의 생각이었다. 결국 굴복하지 않는 사육신의 충절을 본 세조 또한 이들을 가리켜 “당대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고 말했다.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당하였다.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박대년()과 아들 박헌()·박순()·박분()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어머니·처·제수() 등도 대역부도(: 도에 어긋나는 큰 역적)의 가족이라 해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것이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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