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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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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폐비 신씨 - 폐비 신씨(廢妃 愼氏, 1476년 12월 15일(음력 11월 29일)~1537년 5월 16일(음력 4월 8일))  연산군(燕山君)의 왕비(王妃)이다. 폐위되었으므로 시호가 없으며,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라고도 불린다.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과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남편 연산군과 함께 조선에서 반정으로 인해 퇴위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연산군의 비 거창군부인 신씨

 

 세자빈 간택을 통해 1488년(성종 19년) 왕세자(王世子)로 있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 신분으로 입궁하였으며,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지면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으로 처소를 옮겼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폐비(廢妃)가 되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된다. 신씨는 연산군과는 달리 덕이 있었다. 1495년에는 적통공주인 휘신공주(徽愼公主)를, 1498년 1월 10일(음력 12월 18일) 왕실의 적통장자인 원자(元子)를 낳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그녀의 덕을 높이 사고 황금으로 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중종반종 당시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연산군)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남편인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갔지만 별다른 죄가 없는 폐비 신씨는 폐비로 강등 되기는 하였으나 별다른 처벌없이 외가에서 지내게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의 존호를 받았으나, 바로 이듬해인 1506년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군부인(郡夫人)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그녀는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처지임에도 그녀를 죽이라는 사람들이 없었고 신하와 중종은 그녀에게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려로 1521년(중종 16) 11월에 속공(屬公)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았다. 또 중종반정 이후 신씨 집안의 노비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착하고 선한 인품이였기 때문이다.

폐비(廢妃)된 후 중종은 그녀에게 빈(嬪)의 예를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죽음을 앞두고 '부인 신씨를 보고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녀는 사후 연산군 묘 옆에 배장되었고,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명은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이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는 5남 2녀라는 말도 있으나 그것보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더 많았다. 7남 2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과 공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고, 그나마 두 아들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

 

 

 

2. 창녕대군 - 조선 시대 제10대 왕인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연산군이 중종반정에 의해 폐출되면서 형제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조선 시대 10대 왕인 연산군과 신씨 사이의 소생으로 맏형 원자, 형 폐세자 황에 이은 삼남이었으나 원자가 요절하면서 차남으로 기록돼 있다. 본명은 이성(李誠)이며, 대군이라는 명칭은 정실부인, 즉 중전의 소생이라는 의미다. 조선시대에는 왕자들을 구분할 때 중전의 소생일 경우 대군, 후궁의 소생일 경우 군이라고 칭했다.

 

 

3. 휘순공주 -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수억(). 출가 이후 휘신공주()로 봉호를 개칭하였다.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이다. 휘순공주()는 1501년(연산군 7) 구수영()의 넷째 아들 구문경()과 혼인하였고, 이에 따라 구문경은 능양위()로 임명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휘순공주가 출가할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도 평시서()가 휘순공주의 집을 압박하자 그 터를 공주에게 주고 평시서를 옮기도록 한 바 있다. 휘순공주에 대한 연산군의 계속된 특혜는 연이어 논란거리가 되었다.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한 임희재()의 처 구순복()은 구문경의 누이였는데, 본래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기로 하였던 것을 휘순공주의 뜻을 보아 특별히 놓아 주기도 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연산군이 폐위되자 중종은 휘순공주와 구문경의 직첩을 거두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연산군 재위 시 공주에게 사급()하였던 물건 및 가사()와 전민()을 아울러 속공()시키도록 하였는데, 휘순공주의 집은 중종반정의 공신 박원종()에게 넘어갔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던 시아버지 구수영이 연산군과 절혼()할 것을 청하여 휘순공주는 구문경과 이혼하게 되었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구수영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바 있으며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구문경으로 하여금 절혼하게 했다고 비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8년 정광필()은 경연에서 조종조()에서는 부부된 자가 비록 난신 자녀()에 들었다 할지라도 차마 이별시키지 못했다고 하며, 휘순공주의 이혼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어 유순()은 출가한 딸은 그 친부 쪽의 죄에 연좌시키지 않는 뜻이 매우 분명하고, 당시 이혼이 변란을 만나 부득이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니 휘순공주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휘순공주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하였으며, 반정 당시 가사를 모두 몰수하였으므로 빈 집을 사급하여 주거나 그 값을 계산하여 면포를 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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