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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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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돈

 

 

 

1. 이극돈 - 조선전기 사헌부대사헌, 전라도진휼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사고(). 이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직()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이며, 어머니는 노신()의 딸이다.

1457년(세조 3) 친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전농시주부(簿)에 임명되고 1459년(세조 5) 형조좌랑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통례문판관에 이어 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지내고, 1467년(세조 13) 호군()으로 부산포에서 유구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집의로 임명되어 『경국대전()』 형전()·호전() 중에서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불법한 홍윤성()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1468년(세조 14)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일본통신사로 파견되어 예조참의로 승진하였다. 1469년(예종 1) 우윤이 되고, 경회루에서 행한 부시()에서 1등을 하였다. 또 신숙주() 등과 함께 『문정보감()』을 편찬하고, 이어 수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다시 『경국대전()』을 교정하고, 형조참판()으로 승진되었다가 이듬 해 좌리공신() 4등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동지관사()로서 『세조실록()』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1472년광원군() 겸 강원도관찰사(使), 이듬 해 호조참판가 되었다. 1474년(성종 5)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또 예조참판에 임명되어 흥천사() 기우제()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使)가 되어 중궁 책봉에 대한 주본()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8년 병조참판, 이듬 해 예조참판(), 영안도관찰사(使) 겸 영흥부윤()이 되었다. 1481년 이조참판()·사헌부대사헌(),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使)가 되고, 또 노사신() 등과 함께 『강목신증()』을 찬하였다. 1484년 정조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 해 평안도진휼사(使)가 되었다. 또, 서거정() 등과 『동국통감()』을 편찬하였다.

1486년(성종 17) 전라도진휼사(使), 이듬 해 한성부판윤, 평양선위사(使), 1488년 평안도관찰사(使), 1490년 좌참찬()을 거쳐, 이듬 해 병조판서로서 오래도록 전형()을 잡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이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1492년 행 경상도관찰사(使)가 되어 『유양잡조()』·『당송시화()』·『유산악부()』 및 『파한집()』·『보한집()』·『태평통제()』 등의 책을 간행해 바치고, 이듬 해 행 이조판서()가 되었다.

1494년노사신 등과 『계몽의두()』 등의 책과 『대명률()』을 대조해 미비한 것을 참작해 쓸 것을 청하고, 이어 사직기도행향사(使)로서 사직제를 주관하였다. 성종의 국상 때 빈전도감제조(殿調)·산릉간심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우찬성()으로서 지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듬 해 좌찬성이 되었다.

전례에 밝고 사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다 한다. 또한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해,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 한 때 추앙되었다 한다.

하지만 1498년(연산군 4)『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당상관으로서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의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서, 유자광()과 함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해 무오사화()의 빌미를 일부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극돈은 어세겸()·유순()·윤효순()·김전() 등과 함께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화 뒤 잠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광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1501년(연산군 7)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1503년에 69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시호()는 익평()이나, 뒤에 다시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

 

 

2. 이세좌 - 1445(세종 27)∼1504(연산군 10). 조선 전·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맹언(), 호는 한원(). 이지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이다. 아버지는 광성군()이극감()이며, 어머니는 최덕로()의 딸이다.

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대사간으로 특채되었다. 1485년에 이조참판으로 정조사(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광양군()의 봉호를 받았다. 1494년 산릉도감제조(調)로 성종의 국장의례 및 능() 축조를 담당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순변사로 여진족의 귀순처리와 회유책의 강구를 위하여 북방에 파견되었다. 1497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무오사화 때 김종직() 및 그 제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판중추부사()를 거쳐 예조판서·지경연사()를 겸임하였다.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 참석, 어사주를 회배()할 때 어의()에 술을 엎지른 실수로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무안에 부처되었다가 다시 온성·평해에 이배되었다.

이듬해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하였다 하여 다시 거제에 이배되던 중 곤양군양포역()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뒤에 우의정의 추증되었다.

 

 

3. 임숭재 - 선전기 장악원 제조, 채홍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간신이다.본관은 풍천(). 아버지는 임사홍()이며, 성종의 사위이다.

1491년(성종 22) 휘숙옹주(: 성종의 )와 혼인, 풍원위()에 봉해졌다.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임사홍보다 더하였으며 충신들을 추방하고 남의 첩을 빼앗아 왕에게 바침으로써 총애를 받았다. 창덕궁 곁에 저택을 두고 왕과 음란행위를 같이 하는 등 비행을 일삼았고, 미복()으로 궁중을 출입하였다. 가무에 능하여, 1504년(연산군 10) 장악원제조(調)가 되었는데 특히 처용무()를 잘 추었다.

1505년 채홍준사(駿使)에 임명, 경상도의 미녀·준마(駿)를 구할 때 도내 사람들이 놀라 모두 피신하였고, 그가 수레를 타고 다닐 때에는 마치 왕의 행차와 같을 정도였다. 그가 임무를 마치고 상경할 때에는 연산군이 승지를 시켜 강 가에서 맞게 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일찍이 휘숙옹주와 혼인한 날 밤에 집에 불이 나 옹주가 인근 민가에 피신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사신()은 “임사홍은 소인()으로서 불의로 부귀하게 되었는데 복이 지나쳐 재앙이 생겼다.”고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관직을 추탈당하고 부관참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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