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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인조 실록

by 무님 2020.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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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은 조선왕조 제16대 왕인 인조의 재위기간인 1623년 3월에서 1649년 5월까지 26년 2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인조대왕실록>이며, 모두 50권 50책으로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었다. <인조실록>은 인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650년 효종1년 8월 1일 춘추관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을 시작하였다. 인조는 반정에 의하여 광해군을 폐하고 즉위하였기 때문에 즉위년칭원법을 하용하였다. <인조실록>은 1653년 효종3년 6월에 완성되었다. 여기에 관여한 관원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 영춘추관사-이경여, 김육, 도청 당상 지춘추관사-오준, 이후원, 동지춘추관사-윤순지 조석윤,채유후,도청 낭청 편수관-홍명하, 조한영, 이응시,김홍욱, 심세정, 이천기, 권우, 홍처윤, 심지한, 조빈 등이다,

인조는 26년간 재위한 뒤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호는 인조, 존호는 헌문열무명숙순효이며, 능은 장릉으로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에 있다.

 

<인조실록>의 내용

인조의 휘는 종이며, 자는 화백이다. 아버지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 구씨이다. 1607년 선조 40년에 능양도정에 봉해지고, 능양군에 진봉되었다. 1623년 광해 15년 3월 13일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경운궁에서 제 1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괄을 2등공신으로 녹봉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하였다. 이괄은 이에 불만을 품고 1624년 인조2년에 난을 일으켰다. 이괄의 군대가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반군이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관군에 의하여 격파되어 진압돠자 한양으로 돌아왔다. 1627년 인조5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때 후금은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의주를 함락시키고, 평산까지 쳐들어왔다. 이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는 강화조약을 맺었다. 1636년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제의를 거절하자 청나라는 12월에 10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재차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조정은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비빈을 강도로 보낸 뒤 남한산성에서 항거하였다.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하여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제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1644년 소현제자가 볼모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왔는데, 곧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지 않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씨를 죄에 엮어 사사하였다. 1623년 강화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점차 넓혀 나갔고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민간무역을 공인하였으며, 학뭉을 장려하여 우수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인조의 묘

 

인조의 태실이야기

 

16대 임금 인조의 태실은 문헌에 따르면 정토사 앞 봉우리로 전해진다. 그러나 어디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반정을 일으켜 등극한 임금인 중종은 직계손이므로 태실이 있다. 하지만 인조는 방계손이므로 태실이 없음 가능성이 높다. <인조실록>에도 왕명에 의해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정토사 앞 봉우리에 태실이 있다는 기록도 함께 전해지고 있어 유무가 확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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