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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일생을 당쟁으로 살던 < 고산 윤선도 >

by 무님 2020.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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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이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윤선도

 

 

윤선도는 서울 출생.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또는 해옹(). 예빈시부정()을 지낸 유심()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의 양자이다.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살았다. 당시 금서()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 성균관 유생에게 시행하던 시험)에 1등을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했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다. 그곳에서 「견회요(遣懷謠)」 5수와 「우후요(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인 1617년(광해군 9)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됐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됐다. 그 당시 법률로 왕의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 역임했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의 현감()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됐다.

그 뒤 해남에서 병자호란으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아름다운 섬인 보길도(甫吉島)에 은거하였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이라 이름하고 격자봉()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라 했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세연정()·회수당()·석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죄로 1638년(인조 16)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孝宗)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됐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은거했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효종 8)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송시열(宋時烈)과 맞서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와 「논원두표소()」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로 서인과 맞서다가 삼수에 유배됐다. 1667년(현종 8)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문집 『고산선생유고(稿)』에 한시문()이 실려 있으며, 별집()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의 세계관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토대로 풍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윤선도의 산중신

 

 

 

견회요()

 : 광해군 10년, 작자의 30세때 경원() 적거()에서 지었다. 시조 5수로 되어 있는데 각각 그 내용을 보면, ①남이야 어떻게 말하든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가겠다는 고고한 의지를 읊었다. ②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임만은 알아 달라는 애절한 호소를 담았다. ③임금을 끊임없이 그리워함을 시냇물에 비유하여 읊었다. ④산 너머 물 건너 저 멀리 고향에 두고 온 어버이를 그리는 외로운 심정을 노래하였다. ⑤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떠나서 부모에 대한 효성을 생각할 수 없다는 충효()의 관념을 읊었다. 관념과 정감()을 직서()하지 않고 적절한 상징과 비유법을 사용하여 표현했다.

그외 작품은 고금영(古琴詠), 고산유고(孤山遺稿), 금쇄동집고(金鎖同集古), 기세탄(饑歲歎), 만흥(漫興), 몽천요(夢天謠),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산중신곡(山中新曲), 야심요(凍深謠), 어부사시사(漁父四詩詞), 오우가(五友歌), 우후요(兩後謠)

일모요(日暮謠), 조무요(朝霧謠), 증반금(贈伴琴), 초연곡(初筵油), 추야조(秋夜操), 춘효음(春曉吟), 파연곡(罷宴曲), 하우요(夏雨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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