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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왕조실록 < 헌종실록 >

by 무님 2020.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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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실록>은 조선왕조 제24대 왕 헌종의 재위 기간인 1834년 11월에서 1849년 6월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정식 이름은 <헍오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실록>이다. 본문은 16권 8책이며, 행록. 애책문 등으로 수록한 부록이 1책이다. 활자로 간행되었으며,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헌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 : 조인영, 정원용, 권돈인, 김도희, 박희수, 김픙근, 박영원, 도청당상 : 조두순, 서기순,   찬수당상 : 김좌근, 이가우, 윤정현, 김학성, 조학두, 김보근, 도병준, 김수근, 이경재, 김정집

교수당상 : 서헌순, 김병기 등이다.

헌종은 1849년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존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 묘호는 헌종,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경내에 있다.

 

헌종의 이름은 환, 자는 문응, 호는 원헌으로 순조의 손자이며 익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정왕후 조씨로 풍은 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830년 순조 30년 세자였던 아버지 익종이 죽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834년 6월 즉위하였다. 이때 그는 8세였으므로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헌종의 즉위 초에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유지되었으나 1837년 3월부터 외척이었던 풍양 조씨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다. 특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고 헌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치의 주도권이 그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1846년 조만영이 죽은 뒤 다시 안동 김씨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836년에는 남응준, 1844년에는 이덕원, 민진용 등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동요하고 사회가 불안하게 되었다. 풍양 조씨 세도정원은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천주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1839년에 기해사옥이라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이었던 주교 앙베르, 신부 모방과 샤스탕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이때 학살되었다.

1846년에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을 처형하였다. 1845년 이후에는 나라 안 곳곳에 서양 선박의 출몰이 빈번하여 불안을 조성하였다. 헌종 대에는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돋국문헌비>, <삼조보감> 등이 편찬 간행되었다.

 

 

 

 

* 헌종 태실이야기

 

헌종의 태실

 

 

24대 임금 헌종 태실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명월봉에 위치한다. 옥계저수지의 풍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태봉산의 헌종 태실은 역대 임금들의 태실 가운데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1827년 태어나 8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헌종은 재임 중인 1847년에 자신의 태봉지를 단장했다. 당시 태봉지 조성에 대한 안태사 이지연의 보고용 그림과 실록의 기록은 서울 규장각에 있는 '원손아기씨안태등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러나 태실지에는 헌종의 장태일과 가봉일을 알 수 있는 아지비와 가봉비신이 없다. 이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고양시 서삼릉으로 태항아리를 이장하고 난 뒤, 태실 석물이 훼손돼 인근의 민가 앞마당과 태봉 곳곳에 흩어지고, 일부 석물은 분실됐다. 다행히 여러 차례 도난의 위기를 맞을 정도로 중요한 태지석은 현재 덕산면사무소에 보관되는 등 복원에 필요한 중요 석물이 남아 있었다. 석물은 정조와 순조의 태실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양각되는 등 뛰어난 예술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태실 기단과 중동석, 옥개석, 귀부등이 남아 있고, 태실비의 이수와 비신, 난간석은 이미 사라졌다. 귀부(거북이 모형)는 근엄하고 화려하기보다는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헌종의 외항아리는 주둥이가 넓고, 목이 긴 형태다. 어깨는 넓게 벌어지고, S자 형으로 굴곡이 지면서 좁아진다. 내항아리는 외항아리를 축소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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