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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임금 위의 여왕

by 무님 2020.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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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파평(), 성은 윤(), 윤지임()의 딸이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고 12살에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이라고 하는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 덕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왕, 중종이 세 번째로 맞은 왕비였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신씨였는데 연산군 때의 권신 신수근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신하들에 의해 택군(신하들이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된 왕은 자신의 아내를 지킬 힘이 없었고 결국 중종은 신씨가 폐서인이 되는 꼴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중종이 두 번째로 맞은 왕비는 반정의 주도세력이었던 윤임의 여동생 장경왕후윤씨였는데 그녀는 왕비가 된지 8년 만에 훗날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장경왕후 사후 단경왕후를 다시 맞아들이자는 논란이 잠시 일어나기는 했으나 아직 반정주도세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단경왕후의 복위논란은 곧 잦아들었다.

당시 반정공신 세력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서로 분열되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잃은 세자가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경빈 박씨같은 후궁의 자식들에게 치이지 않게 하기위해 세자(훗날 인종)의 외삼촌 윤임은 세자를 보살펴줄 왕비로 자신 가문의 처녀를 왕비 후보로 밀었다. 훗날 문정왕후가 되는 이 윤씨 처녀는 당시 17세였으며 어머니 없이 자랐지만 앞서 실록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에서 배제되어 있던 당시 소녀들과 달리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아 아버지 윤지임으로부터 아들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윤임 덕에 국모라고 하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보다 나이 많은 후궁들의 등쌀과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넷을 줄줄이 낳은 탓에 초기 문정왕후의 삶은 그다지 녹녹하지 못했다. 신하들의 입김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힘없는 왕, 중종의 왕비로 문정왕후는 자신의 앞날이 언제 단경왕후 같아질지 모를 위협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했다. 그녀는 세자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세자를 끼고 돌며 자신의 안위를 간신히 유지하였다. 그녀는 중종이 사랑해 마지않던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이 정쟁에 휘말려 죽어가는 모습도 지켜보았으며 그녀가 아들을 낳아 세자를 위협할까 두려워하는 윤임의 견제도 호시탐탐 당해야만 했다. 말만 국모였지 바늘방석같은 왕비의 자리에서 젊은 시절 문정왕후는 정치의 쓴 맛을 골고루 맛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때의 비참함과 굴욕을 흘려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앞날을 위한 경험으로 체화시켜 나갔다.

 

왕비지만 왕비같지 않은 눈물의 세월을 보내던 문정왕후에게 기회가 왔다. 그녀가 왕비가 된지 20년이 다 되어 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은 것이다. 내리 딸을 낳고 당시로서는 노산인 30대 후반 나이에 아들을 낳은 문정왕후의 기쁨도 잠시 그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지난 긴 세월동안 방패막이 삼아 끼고 돌며 키워 온 세자(훗날 인종)였지만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되자 문정왕후에게 세자는 경원대군을 위해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되었다. 세자를 끌어내리고 경원대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문정왕후는 적극적으로 정쟁에 뛰어 들었다. 그녀는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등의 도움을 받으며 세자와 그를 보호하는 윤임세력과 맞섰다. 두 윤씨의 대립을 윤원형을 소윤이라고 하고 윤임을 대윤이라고 하여 소윤 대윤의 대립이라고 하기도 한다.

 

중종 사후 인종이 다음 왕위를 이어받았고 문정왕후의 정적이던 대윤 윤임은 권력의 핵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문정왕후는 여러 면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이미 권력을 잡은 윤임에게 대놓고 맞서지는 못했다. 대신 몸이 약한 인종을 몰아붙여 힘들게 하였다. 결국 인종은 문정왕후가 바라마지 않게 즉위 8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중종의 유일한 적자로 남은 문정왕후 소생의 경원대군이 12살 나이에 조선 13대 왕 명종으로 즉위하였다.

 

1547년 9월 벽서 한장이 붙는다. '여왕이 권력을 잡고 간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구나! 장차 나라가 망할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여주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외었다. 어찌 한시하지 않은가." <명조실록>

 

당시 문정왕후의 섭정에 대한 불만을 적어놓은 것이다. 이 사건을 일명 '양재역벽서사건'이라고 한다. 이에 문정왕수는 반성하기는 커녕 다시 한번 외척 윤원형을 비판하던 남은 세력을 완벽히 제거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2가지를 의미 한다고 볼수 있다.  첫번째는 윤원형고 같은 외척세력들을 당대 사람들이 매우 싫어했다는 것과 두번째, 문정왕후가 여왕으로 불릴만큼 기세등등 했다는 것이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틀어쥔 뒤 일단 자신을 핍박했던 대윤파를 일소하였다. 이때 윤임과 그 일파가 제거되면서 인종 때 등용된 사림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한 문정왕후는 명실상부 조선의 제1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에게 오점은 그녀의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이 그녀를 도와 정치의 어두운 부분을 도맡아 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은 것이었고 문정왕후 또한 그들을 눈감아주고 함께 일정 정도 부정부패에 일조하였다는 데 있다.

 

조선은 성리항을 중심으로 유교를 받들던 국가이다. 하지만 조선 왕실에선는 남몰래 불교를 키우고 있었다. 선대왕이던 세종, 세조 모두 불교를 통해 죽은 부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조선의 왕실 중에서 불교 사랑의 끝판왕을 보여준 이는 바로 문정왕후였다.

 

그녀는 강원 감사 정만종의 추천으로 승려 보우를 데려와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불교를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자들인 관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첩제를 실시해 선교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에 300여개 절을 공인하였다. 전국의 유학자들이 문정왕후의 때 아닌 불교 부흥책에 아연실색하여 반대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지만 문정왕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때의 불교 부흥책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려 유정과 휴정이 발탁되기도 하였다.보우를 인생의 스승으로 신뢰했던 문정왕후는 그의 건의에 따라 죽은 남편인 중종의 묘를 봉은사 옆으로 이장해오고 자신도 그 곁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그녀는 봉은사를 크게 일으켰으며 갖가지 불교 행사를 연이어 열었다. 도처에서 유학자들이 문정왕후의 이러한 정책에 반발하였지만 그녀는 앞서의 그 어떤 왕도 해내지 못한 독단으로 생전에 불교 진흥을 이루어냈고 죽으면서 유언에서까지 불교의 미래를 걱정했다.

 

명종이 즉위하고 20년, 즉 실질적 제 1권력자로 조선을 20년 간 통치한 문정왕후는 회암사에서 열 큰 재를 앞두고 목욕재계를 한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죽자 염려대로 보우는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고 불교는 다시 핍박받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곁에서 전횡을 휘둘렀던 동생 윤원형과 정난정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중종 옆에 묻히기 위해 무리하게 남편의 능을 이장했던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장한 중종의 묘에서 물이 나오고 지관이 서울 북쪽에 태산을 봉하면 나라가 안정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자 아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능을 지금의 서울 공릉동에 조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태릉이다. 비록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명종은 문정왕후의 정책 중 많은 부분은 폐기하였지만 명종에게 있어서 어머니 문정왕후는 나라를 지켜줄 태산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있긴 하였던 듯하다. 그러기에 문정왕후의 능은 서울 북쪽 태산을 봉하는 위치에 태릉이라는 능호를 달고 조성되었던 것이다.

 

문정왕후 묘 태릉

 

소생으로는 명종 이외에 의혜()·효순()·경현()·인순() 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다.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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