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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이순신 32세 무관에 합격, 47세 전라도좌도 수군군절도사가 되다.

by 무님 202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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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하면 여러가지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나라를 사랑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리고 전장에서 승리를 이끌며 죽어간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충무공 이순신이라 불리는 한 남자를 파란만장한 삶을 떠올린다.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의 딸인 상주 방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 )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이변()은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祿)이 조광조() 등 지치주의()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이순신이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이순신은 위로 이희신()·이요신()의 두 형과 아우 이우신()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자 위에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요()·순()·우()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이순신은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이순신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순신 장국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鹿)가 되었는데,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이순신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滿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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