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단종,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 한 단종 그리고 그의 설화들

by 무님 2020. 2. 24.
728x90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는 천연기념물인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유지비각과 금표비가 있는 청령포 쪽을 바라보면 우거진 소나무 숲 속에 유난히 우뚝 선 우아한 자태의 소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이다.

나이가 600년이라는 관음송은 생멸()하는 물체로서는 유일하게 단종의 유배를 지켜 본 존재이다. 곧, 당시 처절하였던 단종의 생활을 보았으니 관()이요, 하염없던 단종의 오열을 들었으니 음()이라는 뜻이다. 두 갈래로 나뉘어진 아래쪽 가지 사이에 걸터 앉아 무료한 시간을 달래었을 어린 노산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457년 여름 청령포에 큰 홍수가 나자 단종의 유배지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관풍헌은 조선 초기에 영월 동헌 터에 지은 객사다. 넓은 마당을 두고 큰 건물 세 채가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다.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그 뒤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관풍헌은 영월읍 중심부에 자리했다. 담장 앞으로 도로가 나고 상가 건물이 바짝 들어서서 자칫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다. 한적하다 못해 쓸쓸함이 가득한 것이 단종의 불행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이곳에서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세조가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단종은 죽은 후에도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영월 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동강에 나가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엄흥도는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싣고 동을지산 능선을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세월이 흐른 뒤 영월에 부임하는 군수들이 줄줄이 죽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누구도 영월군수로 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용기를 내 부임했다. 어느 날 박충원의 꿈에 단종의 혼령이 나타나 산 속에 묻힌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곳을 수색한 결과 단종의 시신이 발견되어 봉분을 정성스레 조성했다. 그 후로 영월군수가 변을 당하는 일이 없어졌고 영월 땅도 평안했다고 한다.

 

 

단종의 묘 장릉

장릉 설화

아무도 거두어줄 이 없는 단종의 시신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영월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곳에서 건져 지금의 장릉 자리에 암장하고는 세조의 보복이 두려워 종적을 감춰버렸다고 한다.

추익한 설화

단종이 유배된 후 외로이 지낼 때 추익한이라는 충신이 머루를 자주 따다드렸다. 하루는 추익한의 꿈에 단종이 백마를 타고 지나가기에 그 행방을 물었더니 태백산으로 간다 하였다. 추익한이 유배지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단종이 죽임을 당한 뒤인지라, 꿈에 단종이 간 길로 뒤따라 달려가다가 기력이 쇠진하여 죽었다는 이야기다.

낙화암 전설

단종이 죽자 단종을 모셨던 시녀들이 동강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음으로써 그 슬픔을 나타냈다고 한다.

어라연 전설

영월에서 동강을 따라 12㎞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아름다운 어라연 계곡이 나온다. 죽은 뒤 단종의 혼령이 영월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어라연에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였으나, 어라연의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줄줄이 떼지어 나타나서는 ‘안된다, 태백산의 신령이 되어야 한다’고 간곡히 진언하는 바람에 그는 급기야 태백산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단종 혼령이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박충원 설화

단종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주검을 거두었던 엄홍도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려지지 않고 풀섶 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후로 영월에 부임하는 군수 일곱이 원인 모르게 죽어갔다.

중종 36년(1541)에 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은 피신할 것을 권하는 군리들의 말에 “죽는 것은 명()”이라 하며 물리쳤다. 그러던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고 왔다는 이에게 숲 속으로 끌려갔다. 어린 임금을 모시고 6인의 신하가 둘러앉아 있었다. 임금이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번째 앉아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아뢰어서 처형만은 모면하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난 박충원은 꿈 속의 왕이 단종이라 여겨져 묘소를 수소문했다. 엄홍도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보니 과연 꿈 속에서 본 곳이었다. 그는 묘소를 수습하고, 장중하게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끝내 슬픔으로 마감한 단종의 죽음은 여러가지 설화로 남아 있다. 말 그대로 단종의 역사적 기록은 얼마있지 않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편에서 쓰였기에 세조의 입장에선 어린 조카를 죽이고 오른 왕위를 기록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단종의 실화들은 더욱 슬프게 느껴지기만 하다. 조선의 아픈 기억 중 단종의 이야기는 늘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눈물이 되곤 한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