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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중종시대 삼포왜란 일어나다

by 무님 2020.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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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은 1510년(중종 5)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난이다.

 

삼포왜란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 후 국방 문제를 감안,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1407년(태종 7) 부산포( : )와 내이포(, 일명 : ), 1426년(세종 8) 염포( : )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 교역 또는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이 삼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항거왜인()이라 하여 거류한 지 오래된 자 60명만을 잠시 잔류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고 계속 삼포에 들어와 거류했으며, 그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커다란 정치적·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삼포에는 거류 왜인을 총괄하는 그들의 책임자가 있어 일정한 조직 체계 아래에서 활동하였다. 대마도주()는 이들 조직체를 통해 공물로서 면포를 받아가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세종 때부터 그들의 토지 경작에 대한 수세론()이 논의되다가 1494년(성종 25)에 이르러 거류 왜인의 경전()에 대해 수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면세 혜택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책을 악용, 왜인들의 법규위반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고 연산군 때를 거치면서 그 도가 절정에 달하였다. 이에 1506년중종은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왜인에 대해 법규에 따라 엄한 통제를 가하였다.

 

1510년 4월, 제포의 항거왜추()인 오바리시()와 야쓰코() 등이 대마도주의 아들 소()를 대장으로 삼아 4,000∼5,000의 난도()들을 이끌고 부산을 공격하여 첨사(使) 이우증()을 살해하였다.

또, 제포를 공격, 첨사 김세균()을 납치한 뒤 웅천과 동래를 포위, 공격하여 삼포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절도사(使) 황형()과 전방어사(使) 유담년()을 각각 경상좌·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로 보내어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 결과 소는 피살되고 삼포 거류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탔으며, 왜선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참획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참수된 왜인들의 무덤을 높이 쌓아 뒷날 입국하는 왜인들이 위구심()을 가지도록 하였다.

왜란 진압의 공으로 황형 등 188명은 1등으로, 현감 백사반() 등 326명은 2등으로, 갑사() 권영생() 등 359명은 3등으로, 모두 873명이 논공행상되었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겼다. 그리고 이 상태는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 국교를 다시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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