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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태조, 정조 시대 관련 인물5

by 무님 202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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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무 사당

 

 

 

1. 조영무 - 조선전기 개국공신 2등, 정사공신 1등 등에 책록된 공신이며 무신이다. 본관은 한양(). 중국에서 귀화한 조지수()의 고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순후()이고, 아버지는 조세진()이다. 개국공신 1등 조인옥()과 개국공신 2등 조온()이 그 당내이다. 그들의 출세에 힘입어 한양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의 명으로 조영규() 등과 함께 정몽주()를 격살한 뒤 그 해 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殿)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산백()에 봉했졌다.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로서 강계등처도병마사(使)를 겸임하고,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다. 이방원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판중추원사·의흥삼군부중군동지절제사(使)를 거쳐 참찬문하부사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로 병권을 장악,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1등에 봉해졌다. 사병 혁파가 실시될 때 이를 거부하고 무기를 수납하는 군관을 구타했다가 황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으로 나갔다.

그 뒤 판삼군부사()·권행의정부사()·판승추부사()를 거쳐 영승추부사()로 병조전서()를 겸임하였다.

1405년 우정승에 올랐으며, 이듬해 판이병조사()를 겸직한 뒤 1408년 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09년 훈련관도제조(調)를 지내고, 영삼군부사()가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1412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의 위임거부로 물의가 일어나자 추천한 장본인으로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우정승에 복직되었다.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이다.

 

 

2. 조온 - 1347(충목왕 3)∼1417(태종 1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양(). 할아버지는 판서 조돈()이고, 아버지는 용원부원군()조인벽()이다. 어머니는 환조(: 이성계의 아버지인 )의 딸이다.

시조 조지수()는 중국에서 귀화하여 함경도 용진()에서 살았다. 그리고 조지수의 아들 조휘()는 몽고가 침입할 때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투항한 뒤 쌍성총관()이 되었다.

이후 조휘의 손자이며 조온의 할아버지인 조돈에 이르러 고려에 완전히 귀화하여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작전을 도운 공으로 벼슬이 판서에 이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외삼촌인 이성계를 유달리 섬겨왔고,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 때 이조판서로 회군에 참여, 회군공신에 책록되었다. 이후 밀직부사를 거쳐 1392년(공양왕 4)이성계 추대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평양윤()에 임명되고 한천군()에 봉해졌다.1393년(태조 2) 서북면도순문사로 수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했고, 연의주도()의 장정들을 군적()에 등록시켜 군사력 강화를 꾀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친군위도진무()로서 이방원()의 집권을 도와 그 공으로 정사공신() 2등이 되었다. 중추원사를 거쳐 의흥삼군부좌군동지절제사(使)·상의문하부사()를 역임하였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참찬문하부사()로서 이방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해 상왕의 명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을 죽인 죄로 완산부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삼사좌사(使)에 올랐다. 1401년태종이 즉위하자 참찬의정부사()로서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어 부원군()에 진봉되고, 이 해 성절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의정부찬성사·동북면찰리사(使)를 지냈다. 효성이 지극했고 청렴 검소하였다. 시호는 양절()이다.

 

3. 조준 - 조선전기 판문하부사, 좌정승, 영의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평양(). 자는 명중(), 호는 우재() 또는 송당(). 문하시중 조인규()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덕유()이다. 아들 조대림()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와 혼인,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 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조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골어를 잘하여 역관()으로서 출세, 충선왕의 국구()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는데,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했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책을 끼고 수덕궁() 앞을 지나가자, 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에 보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년) 함과에 급제하고, 1376년 좌우위호군()으로서 통례문부사(使)를 겸하고, 강릉도안렴사(使)로 뽑혔는데, 정치를 잘하여 이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어 전법판서()를 거쳐, 1382년 병마도통사 최영()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 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를 징벌하고 병마사를 참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1383년 밀직제학()을 지낸 뒤 상의회의도감사()가 되었다.

도검찰사(使)가 된 뒤에는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평하여 선위좌명공신()에 올랐다. 그러나 권간()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를 공부하고, 윤소종()·허금()·조인옥()·유원정()·정지()·백군녕() 등과 교우를 맺으면서 우왕을 폐하고 왕씨 왕족 중 유망한 인물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 무렵이다.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중망()이 있는 조준을 불러 일을 논의하고는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발탁,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자문하였다. 이에 그는 크게 감격하여, 아는 것을 모두 이성계에게 이야기하는 등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 해 이성계·정도전() 등과 전제 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의를 얻고, 같은 해 7월 처음으로 전제 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였다.

또 다음해 8월과 12월에 잇달아 전제개혁소를 올려 이색()·이림()·우현보()·변안열()·권근()·유백유() 등 전제 개혁 반대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관제·신분·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고, 지문하부사 겸 대사헌()으로 추충여절좌명공신()이 되었다.

이어 조민수()·이인임() 등 권신을 탄핵하고 창왕을 폐위,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이성계·정도전 등과 더불어 중흥공신에 서훈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평리 겸 판상서시사()에 올라 전선()을 주관했고, 다음해에는 찬성사로 승진하여 1391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정도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몽주가 죽자 풀려나와 찬성사·판삼사사()가 되었다. 이 해 7월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에 봉해지고 문하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정치적 실권이 점차 정도전에게 집중되자, 그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세자책봉에 대해 정도전은 이방석()을 지지했으나, 조준은 이를 반대하여 개국에 공이 많은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使)가 되면서 판삼군부사()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요동공벌을 계획하던 정도전과 대립하여 공요운동()을 반대하였다.

조준의 정치적 입장은 자연히 이방원과 가까워져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고, 평소 방원에게 『대학연의()』를 주고 읽기를 권장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혹은 ) 때 백관을 이끌고 적장()을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한 후,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로 있으면서 민무구()·민무질()에게 무고되어 한때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고 좌정승·영의정부사에 승진, 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조준은 사학()을 잘하고 경학()과 시문에도 능했으며, 문집으로 『송당집()』을 남겼다. 한편, 검상조례사()에게 국조의 헌장조례()를 모아 『경제육전()』을 간행하게 했으니, 이는 뒤에 『속육전()』·『육전등록()』 등으로 보완되어 『경국대전()』 편찬의 토대가 되었다.

전제개혁안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목표를 둔 것이었다. 즉, 제1차 상소에서는 녹과전(祿)·구분전()·군전()·투화전()·외역전()·위전()·백정대전()·사사전()·역전()·외록전(祿)·공해전() 등의 설치를 통해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2·3차의 전제개혁상소에서는 세신거실()이 경기 이외의 외방에까지 사전()을 두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고, 기내사전()의 원칙을 고수,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하였다.

1391년 5월에 정해진 과전법은 그의 개혁안이 토대가 된 것이나, 구분전·투화전·백정대전에 대한 분급규정()이 빠져 있고, 그 대신 중흥공신전의 세습에 대한 규정이 첨가되었다.

그가 여말에 올린 국정개혁안은 『주례()』에 바탕을 둔 것으로 광범위한 사회개혁안을 포괄하고 있다. 즉, 총재(,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간과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며, 양천신분제()를 확립하여 국역체제를 강화하고, 경연과 서연제도를 실시하며, 학교(향교)제도를 강화하여 사장()을 폐하고 사서오경을 배우도록 할 것, 『주자가례()』를 시행할 것, 의창()과 상평창()·사창()의 법을 시행할 것, 향리의 출사()를 억제할 것, 환자()의 정치 참여를 막을 것, 과거시험에 복시제()를 시행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관제 및 사회개혁안은 정도전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많으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및 『경제문감()』 편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충()이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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