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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따라 걷는 길 < 속리산 길 > 속리산의 화양동계곡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계곡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화양동이란 명칭은 화양목이 많다 하여 황야동으로 불리다가, 조선 효종 때인 1666년에 우암 송시열이 화양구곡의 경치에 반해 이곳에 머물면서 화양동으로 불리고 있다. 화양동계곡은 제1곡 경천벽에서부너 제9곡 펀천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산세와 독특한 바위 그리고 계곡의 물소리가 어우러져 비경을 빚어낸다. 이곳은 경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셔놓은 만동묘가 있고, 그 옆에는 우암 선생을 제향하기 위한 화양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제4경인 금사담에 이르면 계곡의 맑고 깨끗한 물과 금빛 모래알, 그리고 송시열이 학문을 연마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아서재가 어우러져 화양동계.. 2020. 9. 18.
백제인의 길을 걷다 < 임존성 길 > 임존성은 예산군 광시면과 대흥면, 홍성군 금마면이 만나는 지점에 해발 483.9m의 봉수산이 솟구쳐 있다. 이 산 산정에 조성된 임존산성은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물을 그 안에 모았다가 적의 공격 때 물꼬를 터뜨려 1차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고 결정적인 공격을 가할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임존산성은 약 4km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벽의 높이는 2.5m, 폭은 3.5m인데 남쪽의 성벽은 굴곡이 심하여 성내에는 7~8m의 내호가 둘러져 있다.외벽은 돌로 쌓여 있고 안은 흙으로 메워진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주 약 5,194척, 높이약 2.5m, 폭 약 3.5m로 말을 타고 달려도 넉넉할 정도다. 의자왕 20년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망했을 때 의자왕의 사촌 동생 복신, 도침(스님)과 흑치상지가 3년여 동안 후백제.. 2020. 9. 17.
정조의 효심으로 만들 도시 수원 <현릉원 > 1789년 정조 13년 7월 영조의 부마인 금성위 박명원이 양주으 배봉산 기슭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다녀와서 상소을 올렸다. "뱀 등이 묘지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망주석은 쓰러져 있고 봉분에는 억새불이 돋아 처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박명원 상소문을 읽은 정조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왕의 아버지의 묘가 이 지경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그날의 기록 정조는 조정의 대신들을 희정당에 불러 승지로 하여금 박명원의 상소를 대신 읽게 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은 정조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정조는 아버지 묘를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그 장소는 수원부의 관청 뒤쪽으로 정하고 서유방을 경기관찰사로, 조심태극 수원부사에 임명하여 이장에 대한 일을 맡겼다. 사도세자의 이장은 신속하게 처리.. 2020. 9. 17.
성종시대를 뒤흔든 스캔들의 주인공 < 어우동 > 조선시대에 왕실 여성이 아닌 일반 여성으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인물은 아마도 어우동(於于同, 또는 於乙宇同, ?~1480)이 첫째나 둘째에 꼽힐 것이다. 그런데 긍정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성추문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부정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영화 속 주인공이 되었고, ‘조선을 뒤흔든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박어우동(朴於宇同, 1440년경 ~ 1480년 10월 18일, 현 충청북도 음성군 출생)은 조선시대 성종 시기 장안의 화제였던 인물인다. 연산군일기에 어우동을 '구마'라고도 칭한 것을 보아 본명은 박구마(朴丘麻)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족 관계로는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 어머니는 정귀덕(鄭貴德). 오빠는 박성근(朴成根) .. 2020. 9. 16.
예종, 성종 시대 관련 인물 1. 노사신 - 1427(세종 9)∼1498(연산군 4).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자반(子胖), 호는 보진재(葆眞齋)·천은당(天隱堂). 노균(盧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노한(盧閈)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노물재(盧物載)이며, 어머니는 심온(沈溫)의 딸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시,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곧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에 선임되었다. 이어 집현전부수찬·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여 국가 사명(國家詞命)을 관장하였다. 1459년(세조 5)에는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 이듬해는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462년에 세조의 총애로 세자좌문학에서 5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그 뒤 우부승.. 2020. 9. 16.
사색하기 좋은 외암리의 옛길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설화산의 등산로로 이어지는 호젓한 산책로는 아름다운 풍광과 고택의 신비함이 더해져, 멋을 자아낸다. 외암 민속 마을은 외암마을은 예안이씨 중심으로 구성 된 마을이다. 마을 앞쪽으로 넓은 농경지를 두고,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막아주는 사이의 구룡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이 처음에는 넓은 농경지로 인해 자연발생적인듯 하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예안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인물이 나타나자 점차 예안이씨 후손들이 번성하여 집성 마을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마을은 입구의 물(다리)를 건너면서 약한 구릉지에 집들이 길을 따라 독특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 가운데로 안길이 있고 이 안길은 올라가면서 좌우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은 하늘에서 보면 마치 나뭇가지와 같이 큰 줄.. 2020. 9. 15.
정조 꿈을 이루어 준 정약용 < 수원화성 > 정약용은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약용의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린 이유로, 큰 형 약현이'삼미집'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어.. 2020. 9. 15.
벚꽃이 아름다운 개심사 걷고, 백제의 미소 < 서산마애삼존불> 보다 왕벚꽃이 만개하는 봄철에 개심사는 아름답다. 하지만 어느 계절과 상관없이 개심사의 절집은 평안을 준다. 서산에 걷기를 시작하기 전 절집의 길을 가볍게 걸어주고, 백제인의 미소가 담긴 일대를 둘러보는 길을 걷는다면 고됨 속에 힐링을 느낄 수 있다. 서산의 상왕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에 창건 되었고 ' 마음을 여는 사찰'이란 뜻을 담고 있다.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사찰의 곳곳에서 묻어나는 고풍스러우면서도 고즈넉한 부위기가 방문자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전해주는 곳이다. 4월 말경에 방문하면 왕벚꽃으로 뒤덮인 사찰의 운치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혹적이다. 개심사를 둘러보고 보원사지와 서산마애불를 보는 걷기의 시작은 우선 차로 이동하여야 한다. 개심사에서 보원사지와 서산마.. 2020. 9. 14.
정조의 효심이 담긴 < 화성 행궁 과 융건릉 >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효심이 각별했던 임금이다. 왕위에 있는 동안 보여준 지극한 효심은 백성에게까지 추앙을 받았다. 그는 비명에 숨져간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옮겨 묘호를 바로 세우는 등 선친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 1년에도 수차례 능 참배길에 나섰고 가식 없는 효심으로 백성을 감복시켰다. 정조는 사후에도 부친의 능이 있는 지금의 화성시 화산 기슭에 묻혔다. 수원시 교외 약 8km쯤에 자리잡은 융건릉(隆健陵 사적206호)은 부친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健陵)을 말한다. 융릉은 화산의 서남쪽, 건릉은 서북쪽 기슭에 들어 있어 모두 서향이다. 융건릉과 함께 들러 보아야 할 곳으로 기복사인 용주사가 있다... 2020.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