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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

고려왕조실록 - 정종 실록

by 무님 2021.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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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은 고려 시대의 제3대 왕(재위 945~949)으로 정적을 제거하며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왕요(). 자는 천의().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인 신명순성왕태후()이다. 비()는 문공왕후 박씨( )와 문성왕후 박씨( )이다.

 

 

고려 제3대왕 정조의 능 < 왕릉 >

 

 

정종 왕요는 923년에 태어났다. 그는 신명순성왕후의 두 번째 소생이며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신명순성왕후의 첫 번째 소생인 태가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란에 그가 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왕요는 태조의 차남이었지만 그는 장남 혜종보다는 지지기반이 튼튼하였다. 강력한 호족 세력인 충주 유씨가 그의 외가였기 때문이다. 혜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945년 9월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 

 

정종은 강인하고 고집스러운 성품이면서 한편으로는 불심이 깊고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종은 즉위하자마자 서경으로 천도를 천명했다. 그 이유는 즉위 과정에서 개경파와 지나치게 대립한 데다가 즉위 이후에는 개경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개경 백성들의 민심이 돌려 버린 것이 원인이었다.

서경 천도가 공론으로 확정되고 947년 봄부터 궁궐 공사가 본격화되었다. 개경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엄청난 자재와 식량이 동원되면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정종은 거란군의 내침을 대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군 30반을 조직하였다. 광군은 호족군 연합체로 30만이라는 대군을 형성했던 것을 보면 일종의 예군이 었다. 호족들을 광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광군사를 두어 그들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제제를 구상하였다.

정종은 즉위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인명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많았다. 그 죄책감이 원인이 되어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등 불교진흥책도 실시하였다. 하지만 948년 9월에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 등이 말 7백 필과 토산물을 바쳤는데, 이때 손수 이 물건들을 검열하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우레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들고 만다.  그 일로 인해 그가 병상에 눕자 백성들은 머지않아 부역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좋아하였으며, 이 같은 민심에 정종은 점차 기력을 잃었다. 

949년 정월, 병상에서 그는 왕식렴의 부고를 접해야만 했다. 그리고 두달후인 3월에 병이 더욱 위독해져 동복 아우 왕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재위 연수는 4년이었으며 향수는 27세였다.

 

그가 죽고 서경 천도계획은 취소되었다. 

성종 대의 최승로는 '시무 28조'와 함께 올린 '5조 치적평'을 통하여 서경 천도계획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정종은 도참을 그릇되게 믿고 왕성을 옮길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천성이 강한 반면에 고집을 꺾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난폭하게 끌어모아 공사를 일으켜 사람들을 고생시켰습니다. 그래서 비록 임금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옳다고 하는 일도 백성들의 마음은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원성이 일어났고, 재앙이 그림자처럼 빨리 나타나서 미처 서경으로 옮기지도 못한 채 영영 왕위를 떠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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