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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야기

고려 제 5대 왕 경종 - 화합정책과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

by 무님 2021.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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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이 죽자 고려의 정국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광종의 정책에 의해 밀려났던 호족들이 경종의 즉위와 동시에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고려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호족들은 가장 먼저 광종 대의 수모를 앙갚음하기 위해 복수전을 펼치게 되고, 이로 인해 고려에는 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경종은 즉위하자 곧 대사면령을 내려 귀양 중에 있는 신하들을 돌아오게 하고 갇혔던 사람들을 풀어주었으며,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직시킨다. 또한 광종 대에 설치됐던 임시 감옥을 모두 헐고 신하들을 참소한 글들을 불살랐다. 광종 11년 이후 15년 동안 지속되던 공포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성종은 공포정치의 종결을 알리는 의미로 호족 출신 왕선을 집정(재상)에 임명하고 광조 시대의 잔재 청산 정책을 실시했다. 호족 출신 왕선이 집정에 임명되자 이들 참소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전이 펼쳐진다. 왕선은 경종에게 복수법 마련을 건의했는데, 이는 광종 대에 참소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왕선을 비롯한 호족 세력의 강력한 건의에 밀려 복수법을 허락하게 되고, 이 때문에 곳곳에서는 피바람이 이어지게 된다.

 

 

 

복수법을 통한 화합정치를 도모

경종이 복수법 건의를 받아들인 것은 공포정치 이후 왕실에 등을 돌린 호족들을 달래고 화합정치를 모색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복수전이 가열되면서 경종의 화합정치에 대한 열망은 퇴색되고 정국은 혼란스러워져 갔다.

호족들의 복수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태조 왕건과 천안부원부인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효성태자와 태자의 제10비 숙목부인 소생 원녕태자가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왕선이 복수법을 빌미로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종실의 어른을 살해했던 것이다. 

호족들의 복수전으로 종실의 어른이 살해당하자 경종은 곧 복수법을 금하고 왕선을 파직시켜 귀양의 보내게 하였으며,

순질과 신질을 좌우집정에 임명하고 그들에게 내사령을 겸하게 하였다. 이는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좌우집정제의 확립

 

좌우집정제를 확립한 경종은 전시과를 마련하여 토지제도의 혁신적인 변환을 꾀한다.

고려는 토지제도의 변환을 시행은 여러 번에 시도되었지만 호족들에 의해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그런데 경종의 의해 고려 개국 후 토지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하게 된 것이다.

전시과는 관품과 인품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로 당시의 지배 계층 전체를 정부의 토지제도 틀 내에 흡수하려는 획기적인 조처였으며,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좌우집정제와 전시과를 마련한 것은 경종의 왕권의 안정을 노린 탁월한 정치력이었다.

 

 

 

그밖의 정책들

977년에는 친히 진사시를 주관하여 고응 등 여섯 사람을 급제시켰으며, 송과의 국교도 돈독히 하여 사신의 내왕이 잦았다. 979년에는 발해 유민 수만 명을 받아들였고, 청새진(지금의 희천)에 성을 쌓아 변방의 안정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유배되어 있던 최지몽이 내의령에 임명되면서 고려 조정은 다시 한 번 역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된 왕승은 왕족이거나,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부여받은 유려한 호족 출신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최지몽이 그에게 역모 혐의를 씌웠다는 것은 경종 집권 후 세력을 정비한 호족들이 다시금 왕권에 도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시도하던 경종은 호족 세력의 견제를 받자 쫓겨났던 최지몽을 등용하여 정적들을 역도로 몰아 제거했다. 최지몽은 점성술에 능한 인물인 데다가 왕규를 제거할 때 깊숙이 관여한 바 있었기 때문에 경종의 그의 예언적 능력을 정적 제거에 이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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