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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광해군일기

by 무님 2020.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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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 제 15대 왕이었던 광해군 1575년에서 1641년의 재위 15년 2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15년간 왕으로 재위하였으나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일기>는 모두 187개월간에 걸친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서에 의하여 편년체로 서술되었다. 각 달마다 한권씩으로 편철하여 재위기간 187개월 분이 총 187권으로 구성되었다. <광해군일기>는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활자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광해군일기>의 편찬에 참여한 전후 찬수청 관원은 다음과 같다. 총재관-좌의정 윤방, 도청당상-이정귀, 김유, 도청낭청-이식.이명한.이경여.유백중.김시야.정백창.정홍명.김세렴.김육, 일반당상-한준겸.서성.홍서봉.이수광.권진기, 일방낭청-8명, 이방당상-정광적.정엽, 장유,오백령.남이공 등이다.

그는 종묭에 들어가지 못하여 묘호, 존호, 시호를 받지 못하였고, 왕자 때 받은 봉군 작호인 '광해군'으로 호칭되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지건면 송릉리에 있다.

 

 

<광해군일기>의 내용

 

<광해군일기>는 인조반정의 의하여 집권한 서인들이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적인 비판이 많이 작용하였다. 정초본이 곧 완성본으므로 이것이 곧 본디 의미의 <광해군일기>이다. 광해군의 이름은 혼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관해군은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놓였던 4월 29일 세자에 책봉되었다. 

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가 총명하고 횽경스럽다는 이유로 지명된 것이다. 다음날 선조와 조정은 피난길에 올랐는데,

도중 영변에서 국왕과 세자가 조정을 나누게 되었다.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아나자 그의 세자 지위는 매우 위태로웠으나 정인홍 등 북인의 지원으로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할 수 있었다. 그가 즉위한 후에도 명나라에서는 한동안 그의 임명을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시키고 유영경을 죽이는 등 파란이 있었다. 1613년에는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 서인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죽였다. 1615년에는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 전을 죽였고,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시켰다.

1619년에는 명나라에는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여 명의 구사를 주어 후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사르허 전투에서 패한 뒤에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 균형을 취하였다. 광해군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쫓겨나 강화도와 제주도 등재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태실 이야기

 

 

 

 

 

인조 반정으로 폐위된 15대 임금 광해군의 태실은 혹독히 파괴된 채 대구시 북구 연경동 뒷산에 미복원 상태로 남아 있다. 광해군 태실로 가는 입구 길목에는 '연경동 태실'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산길을 따라 약 300~400m쯤 오르면 예사롭지 않게 생긴 커다란 바위 두개를 만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석조물이다. 연꽃 문양이 새겨진, 아래 받침이 육각형인 석조물은 비스듬히 누워 있다.

 

 

 

 

 

 

거북 같이 생긴 석조물은 깨진 채 방치돼 있다. 남쪽으로 50m쯤 내려가면 석조물에서 떨어진 파편과 망가진 비석 2개가 나뒹굴고 있다. 한 비석에는 용아기씨태실. 다른 비석에는 왕자겨이란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있다. 또 다른 석물에는 '만력''一月日력' 등의 글자가 보인다.

근처에는 세워진 문화재청의 안내문에는 광해군 태실에 대한 발굴조사가 2013년 12월 부터 시작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곳이 광해군 태실이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비석이나 석물들이 그저 비닐에 싸인 채 흩어져 있을 뿐이다. 당시 조사 결과, 광해군 태실은 대부분의 유물이 도굴되고 지상 구조가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 하지만 부서진 태실의 조각들이 남아 있고, 지하 구조가 일부 잔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현재 대구시에서는 국가지정 문화재 지정 추진 및 복원을 추친중이다.

파편 조각 중에 발견된 '아기태실비'의 명문을 보면,

<王子慶龍阿只氏胎室>

왕자경룡아기씨태실

로, 전면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며 후면은 확인이 되지 않아 태실의 정확한 조성 시기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태지석의

(皇明萬曆三年四月二十六日卯時生 王子慶龍阿只氏胎萬曆九年四月初一日癸時裝)

(황명만력삼년사월이십육일묘시생 왕자경룡아지씨태만력구년사월초일일계시장)

이라는 기록을 통해 광해군은 선조 8년(1575년) 태어났으며 선조 14년에 태실이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폐륜적인 행위와 당시의 사상과 맞지 않는 실리외교등의 이유하에 인조반정으로 폐위에 이르렀지만, 분조활동을 했던 세자기간은 물론 15년 재위기간동안 성실하고 정사를 잘 돌본 왕으로,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파들간의 권력싸움에서 희생된것에 가깝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해군은 폐위에 이른 후, 끝내 묘호를 갖지못한 왕으로 남게 되었다.

하루빨리 훼손된 태실이 복원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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