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선조의 장자 임해군

by 무님 2020. 5. 3.
728x90

임해군은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의 서자인 왕자이자 맏아들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진(), 자()는 진국(). 어머니는 사도시첨정 김희철()의 딸이다.성품이 사나워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순화군(順化君)과 동북지방으로 피난 가서 가토[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 등이 모해하여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ㆍ김제남(金悌男 : 인목대비의 아버지)과 함께 역모죄(逆謀罪)로 몰려 살해되었다.

 

서자이지만 서열이 첫째이므로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하나 성질이 난폭하여 아우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의하여 순화군()과 함께 김귀영()·윤탁연() 등을 대동하고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함경도로 떠났다.

그 해 9월 반적 국경인() 등에 의하여 포로가 되어 왜장 가토()에게 넘겨져 고원()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여러 차례 석방협상 끝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본래 성질이 포악한 데다가 포로가 되었던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그 포악함은 더욱 심해져서 분을 발산시키기 위하여 길거리를 헤매었고 민가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상민을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왜장 가토는 포로로 있을 때 친분을 기화로 여러 차례 그에게 서신을 보내서 내정을 탐사하려고 하였다.

그 뒤 1603년 사옹원도제조가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봉작에 대한 서열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일부 대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되었고, 이듬해 죽음을 당하였다.

1623년(인조 1)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등극하자 복작신원(: 관작을 회복하여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내린 시호는 정민()이다.

 

임해군의 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왕족인 임해군 이진()의 묘가 있다. 묘역은 진건읍 송능리 산56번지에 있다. 원형의 봉분은 활개를 갖추었으며, 봉분의 주위로 10매의 둘레돌을 둘렀다. 봉분의 앞으로 혼유석(), 상석(), 장대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을 갖추었다. 망주석의 기둥 윗부분에는 꽃잎이 위로 향한 꽃문양을 조각하여 장식하였으며, 문인석은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있다.

 

 

728x90

'조선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해군시대 관련 사건 - 계축옥사 ( 칠서지옥 )  (0) 2020.05.05
광해군일기  (0) 2020.05.04
행주대첩  (0) 2020.04.29
권율장군, 임진왜란 행주대첩의 승리  (0) 2020.04.28
류성룡 <징비록>쓰다  (0) 2020.04.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