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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류성룡 <징비록>쓰다

by 무님 2020.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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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문신. 25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우의정 자리에 오른다. 임진왜란1)이 일어났을 때 총책임관을 맡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인 <징비록>을 썼다.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의 사촌마을 외가에서 태어났고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의 하회마을에서 성장했다. 그 후 안동에서 지내다가 20대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

1564년 명종 때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했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중용되어 그럭저럭 순탄한 관직 코스를 밟았으며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만 그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선조의 즉위와 함께 갓 집권한 사림파가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는 시기였고, 류성룡도 여기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그는 상대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제자가 많았던 동인에 속했다. 특히 정여립의 난과 관련한 기축 옥사와 그와 관련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원만한 처신과 선조의 비호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건저 문제(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영수 정철이 실각하자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동인이 이산해, 정인홍이 이끄는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열하는데, 류성룡은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또한 이 무렵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이 되었다. 일본의 전국시대가 종결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던 참이었지만 류성룡은 같은 당파이자 쌍벽을 이루는 이황의 수제자였던 김성일의 보고를 듣고 기본적으로는 '설마'했던 것 같다.[11] 하지만 역시 찜찜했는지 이순신이나 권율 등을 천거해서 등용하도록 조치하고 각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등 나름의 전쟁 준비를 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조선군은 무너져 선조가 피난을 가야 할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 때 전란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간관들의 탄핵으로 인해 잠시 이산해와 함께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고, 이 때 비변사의 도제조이면서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이자 도체찰사가 되어(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 겸 총사령관) 조선의 내정과 군사를 모두 총괄했으며, 조선 후기의 군영으로 유명한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도 바로 그였고 또한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원만히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외 화포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했으며 새로 설치된 훈련도감의 관리역으로 임명되어 병법서를 강의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많은 일을 했다.

 

유성룡은 전쟁 중 여러 관료들의 의견이 나뉘며 반대파에 의해 비난당했고, 결국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1600년에 다시 벼슬 지위를 받았지만 그는 관직을 거절하고, 평생을 제자를 가르치고 책을 쓰면서 보냈다. 그때 쓴 책이 바로 <징비록>이다. 이 책에는 임진왜란의 상황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두 차례의 전쟁을 직접 겪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써서 더 가치가 있다. 단순히 전투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 등에 걸치는 종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중요한 연구 자료로 오늘날까지 인정받고 있다.

『징비록()』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 유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로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인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것으로,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의 "예기징이비역환()",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유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 씌어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물론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다룬 유일한 기록문은 아니다. 하지만 유성룡이 전란 당시 전황이 돌아가는 급박한 사정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기록문학의 일차적 자료가 되는 조정의 여러 공문서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으로서의 『징비록』이 갖는 가치와 매력은 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징비록』은 전쟁의 경위와 전황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을 비롯하여, 전란으로 인해서 극도로 피폐해진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전란 당시에 활약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인물평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로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인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기록문학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자의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징비록』은 신뢰를 받고 있다. 애초에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공론정치의 활성화라는 목적에서 시작된 붕당정치는, 선조 때부터 소모적인 당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집권층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었으며 전란을 불과 1년 앞둔 1591년에는 집권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조정의 공론을 분열시켰고 그에 따라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유성룡 역시도 동인의 일원인 남인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능이나 전술의 부재로 인해 전투를 그르친 일부 장수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제외하면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징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때 상대 정파에 의해 탄핵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그였지만, 전란을 회고하는 이 노정객의 안타까움과 반성의 심정은 당파적 증오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류성룡은 전란이 끝나갈 무렵 1598년에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랑 일본이랑 함께 명나라를 치려 온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 '무게감 있는 대신이 가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고, 선조 또한 그것을 원해서 류성룡에게 이를 해명하러 갔다 오라고 부탁했지만 류성룡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이를 사양하였다. 그런데 북인이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을 이 일을 빌미삼아 탄핵을 하였고, 결국 삭탈 관직되어 낙향했다.

그후 1600년 복직되었으나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저술에 힘썼다. 이 때 쓰여진 저작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징비록》.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실태와 참상, 그리고 이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연구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조용히 살다가 1604년 은거하던 고향 하회 마을이 수해를 입는 바람에 하회 마을에서 풍산 서미동으로 옮겨 살았고, 1607년 음력 5월 6일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류성룡의 문집 《서애집》의 서애선생연보에는 말년에 "조용히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손님들을 물리치며 살았다고 하며, 류성룡이 임종하는 모습이 상세히 적혀 있다

 

류성료의 묘

 

묘소는 안동시 풍산읍 수2리에 있다. 1589년에 먼저 사망한 아내 전주 이씨와 합장되어 있다. 류성룡의 부인 이씨는 바로 세종대왕의 5남인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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