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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의 대리청정

by 무님 2020.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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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후 20여 년간 국정을 장악하였던 여성 독재자다. 본관은 파평().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이다.

 

1517년, 17세 때 당시 중종의 왕비이자 문정왕후에게는 9촌인 삼당고모인 장경왕후가 죽자 원자 이호(훗날의 인종)의 외숙부 윤임의 뒷배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르고 중전이 되었다. 중전이 되었으므로 당시 태어난 원자 이호를 잘 돌봐야 할 책무가 있었고, 처음엔 성심성의껏 훈육하였다. 당시 중종은 후궁들로부터 많은 서통 왕자들을 얻은 상태였으나, 적통 왕자는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이호가 유일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인지라 든든한 친정 배경에 왕자들까지 생산한 후궁들보다도 기반이 미약했던 문정왕후는, 적통 왕자를 낳아 입지를 다지려 했다. 실제로 문정왕후는 연달아 임신하여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 인순공주(仁順公主)를 낳았다.

 

문정왕후가 34살의 나이에 마침내 고명아들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정국에는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사실 경원대군을 낳기 전까지의 문정왕후는 세자의 편이 되어 세자를 감싸는 입장이었다. 상술한 작서의 변 사건 때도 문정왕후는 최대한 힘써서 세자를 보호했다. 혹시나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로 중종이 죽게 된다면, 왕으로 즉위한 세자를 등에 업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하던 아들을 낳자, 문정왕후는 태도를 싹 바꿔 노골적으로 세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중종 말년 세자가 있는 자선당이 불탄 사건의 배후로 문정왕후가 지목받을 정도다. 이 때부터 자신의 남동생들을 불러 당파를 만드는데 그 유명한 윤원로와 윤원형. 이들이 바로 소윤(小尹)의 축이다. 그 후 대윤의 영수이자 세자의 외숙 윤임과 김안로가 짜고 맘에 안 드는 문정왕후를 찍어내려 하나, 여기서 실패. 이를 눈치챈 중종은 "김안로가 대역부도하다"며 도리어 그를 찍어내고 사약을 내린다. 이때 또 다른 세자의 보호자 윤임이 김안로 숙청에서 한몫을 담당하는 바람에, 세자를 옹호하는 세력(대윤)들을 때려잡는 데는 실패하고 다만 세력을 엇비슷하게 맞추는 데는 성공했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세자가 인종이 되었으니, 소윤은 픽 사그라들고 대윤의 기세가 승승장구했다. 중종의 장례 때 인종은 장례의식을 철저히 준수하며 안 그래도 허약한 몸을 망치고 있었는데, 그랬던 인종에게 계모 문정왕후의 핍박은 더욱 치명타였다는 견해도 있다. 결국 인종은 몸이 본래 약한데다가 아버지 중종의 장례를 무리하게 치르느라 등극한지 9개월만에 요절했다.

 

1545년, 결국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명종이고, 이와 더불어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과 대윤을 찍어내었고 오히려 자신을 길들이려는 대신들이 윤원로를 귀양보내자 오히려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유관, 유인숙을 비롯한 대신들을 차례로 죽였고 백인걸, 권벌, 이언적을 비롯한 반대파 대신들도 유배를 보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다음해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다시 사림들과 눈엣가시였던 다른 왕족들도 제거하였다. 

승 보우()를 신임하여 불교의 부흥을 꾀하여 1550년(명종 5)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도첩제()를 다시 실시하였고, 중종의 능을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로 이장시켰다. 1553년 국정을 왕에게 맡겼으나 실질적인 대권은 계속 장악하여 윤원형 등 친척에게 정사를 좌우하게 하였다

20살이 된 명종이 친정을 하자, 편전을 내주고 물러난 문정왕후는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윤원형을 이용해 조정의 뜻을 모았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내시와 궁녀들을 이용해 명종을 감시했으며 명종에게 가서 따지고, 만약 아들인 명종이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다 큰 자식, 그것도 임금에게 뺨을 때리거나 회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명종은 어머니만 보면 겁부터 먹고 쫄며 지냈다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야사도 어느 정도는 실제 상황을 반영하기는 한 모양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주상께서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31권, 2번째

 

문정왕후의 묘

 

1565년 창덕궁에서 문정왕후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 유명한 태릉선수촌이 바로 근처에 있다. 왕비의 무덤인데 능호가 클 태(泰) 자인 것을 보면, 문정왕후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크기도 웬만한 왕의 무덤보다도 더 크다. 본래 문정왕후는 중종과 묻히고 싶어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장경왕후의 무덤 옆에서 선릉(宣陵, 중종의 아버지 성종의 능) 근처에다 이미 마련하였으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강 건너 북쪽인 태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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