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생육신 김시습

by 무님 2020. 4. 1.
728x90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유·불()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고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등을 정리했으며 《산거백영》을 썼다.

 

본관 강릉(). 자 열경(). 호 매월당()·동봉()·청한자()·벽산(). 법호 설잠(). 시호 청간().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에서 부친 김일성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로 이름이 높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인 김시습(, 1435~1493)은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일생은 동가숙서가식하는 떠돌이의 삶이었지만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 지식인의 의무에는 누구보다 엄격하였으며, 그 결과 율곡 이이로부터 백세의 스승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강릉 김씨로 태어난 곳은 서울의 성균관 부근이었다.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동봉()•청한자()•벽산()이었으며, 법호는 설잠(), 시호는 청간()이다. 그의 집안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문재()를 드날린 것에 비해 대를 이은 무반의 집안이었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라는 시를 읊었다 

5세인 1439년(세종 21)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이계전()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성균관 대사성김반()에게서 『맹자』·『시경』·『서경』을 배웠고, 겸사성윤상()에게서 『주역』·『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449년(세종 31)에는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15세의 나이로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별세하였고, 당시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남효례()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그 후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김시습은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하던 공부를 접고 책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법명은 설잠()이었다. 이로서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 중에 한명이 되었는데 이들을 생육신이라고 한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西)』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하여 명리()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에 참가하여, 교정()일을 맡아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세조 11)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이 영의정이고, 김수온()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를 집필하였다. [금오신화]는 전기체 소설의 효시로서 현재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등 5편이 남아 있는데, 현전하는 책의 구성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인물들로, 모두 현실 세상을 등지고 몽유적 세계 속에서 기이한 일을 겪는다. 이전의 한문 창작물들과는 달리 주인공은 우리나라 사람이며, 배경 또한 우리나라로 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풍속과 사상, 감정이 잘 녹아 있다. [금오신화]는 중국 명나라 때의 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추측되는데, 작품 속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반해 인간을 압박하는 것들에 대해 강력한 대항을 하고 있어 자유와 초월을 갈구하는 작가만의 개성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한문소설의 기준을 세웠고, 이를 시작으로 이후 많은 한문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금오신화]는 창작 당대부터 희귀본이어서 옛 문헌에 이따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 한말 이래 소설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이 발견하여 잡지 [계명()] 19호를 통해 1927년에 국내에 소개하였다. 이때 발견된 목판본에 현전하는 5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에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였던 정병욱이 필사본을 발견하였다.

금오산실에 머무는 동안 김시습은 소설뿐만 아니라 많은 한시들을 썼는데 이들은 [유금오록(錄)]에 남아 있다.

[금오신화]를 쓰고 난 뒤 김시습은 경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올라와 수락산 등지에서 승려로 10여 년을 산다. 그러다가 40대 후반 문득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으며 안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는 등 환속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성종대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나고 정국이 흉흉해지자 다시 길을 떠나 강원도 일대를 유람하였다. 김시습은 방랑생활 동안 지방의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여행지마다 시를 써서 남기기도 하였다. 말년에 김시습은 부여의 무량사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유교식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온 대로 불교식으로 화장하였고, 유골은 부도에 안장되었다.

 

김시습 승탑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단종이 복위된 1707년(숙종 33)에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는 청간()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728x90

'조선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조의 책사, 한명회  (0) 2020.04.02
세조의 신하가 된 신숙주  (0) 2020.04.01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0) 2020.04.01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0) 2020.03.31
단종의 고명대신 김종서  (0) 2020.03.3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