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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세조의 책사, 한명회

by 무님 2020.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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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살해하는데 가담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관직이 삭탈되어 압구정에서 노년을 보내다 사망하였다

 

본관 청주(). 자 자준(). 호 압구정()·사우당(). 시호 충성(). 장순왕후(:)·공혜왕후(:)의 아버지이다. 그의 조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고 돌아온 한상질()이며 부친은 한기()이다.

한명회는 잉태된 지 7달 만에 태어나, 어려서는 사지가 완전치 못했는데, 차츰 장성하면서 체구가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커지고, 또 지모가 남달리 뛰어났다. 젊었을 때에 절에서 글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산골짝을 가는데 범이 그를 호위하고 갔다. 공이 이르기를, “멀리까지 와서 보내 주니 족히 후의를 알 수 있네.” 하였더니 범이 마치 머리를 숙이고 꿇어 엎드리는 듯이 하더니 날이 밝을 무렵에야 갔다. 또 한 번은 그가 영통사란 절에 들러 머무른 일이 있었다. 그때 늙은 중 한 사람이 그의 상을 훑어보고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의 머리 위에는 혁혁한 기운이 있어서, 뒤에 반드시 귀하게 되겠소. 그리고 명년에는 지기()를 얻게 될 거요.”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한명회는 크게 기뻐하고는, 바로 발걸음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한명회는 젊어서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히 낙방하자 나이 40세가 다되어 1452년(문종 2) 음보()로 경덕궁직()을 얻었다. 친구인 교리()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무리에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 양정 등 30여 명을 추천하였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다

수양대군은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몰래 모았는데, 그 가운데 자원해서 수양대군에게 접근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한명회였다.

“지금 임금은 어린데, 범 같은 대군들이 도사리고 있어 백성들의 소문이 자못 어지러운 이때에 큰일을 꾀하시는 분들이 어찌 이리 한가하시오. 들으니 수양대군은 위대하시고 매우 용맹스럽다기에 내 뜻한 바 있어 찾아왔거니와, 우리 함께 그를 추대하고 대사를 도모하여 명성을 떨쳐 보지 않으시렵니까.” 한명회가 친구 권람에게 한 말로, 이를 계기로 권람의 추천을 받아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대면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여러 모로 한명회를 시험하고는 한명회를 가리켜 “그대야말로 나의 자방()이로다!”라고 후대하였다. 자방이란 중국 한나라 때의 책사 장량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수양대군 측의 모든 계책은 한명회로부터 나왔다.

한 번은 수양대군 측에 쓸 만한 무사들이 없음을 보고는 수양대군에게 비밀히 말하여 무사들과 결탁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이 그 방법을 묻자, 한명회는, “이것은 가장 쉽습니다. 활쏘기 연습이란 명분으로 술과 안주를 많이 장만해서 매일 모화관()과 훈련원으로 나가 활쏘기를 하고 나서, 무사들을 먹이면 다 사귀실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한명회는 수양대군 측의 일등 모사였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이후 군기녹사()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소윤()에 올랐다.
1454년 동부승지()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 그해 좌익공신()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에 적극 가담하여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1457년 이조판서가 되고, 상당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하였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치보다는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을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이 되고,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어 병으로 한때 물러났다.
1467년(세조14년) 이시애()의 난 때 반역했다고 하여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고, 다음해 세조가 죽고 이 해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올랐고,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불편한 관계였던 예종이 갑자기 죽고 막내사위인 성종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이 되어 서정()을 결재하였다. 이때도 병권에는 관심이 높아 병조판서를 겸하였고 그의 세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1471년 좌리공신() 1등이 되고, 그 해 춘추관영사()에 이르렀다.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추락하기 시작하였다.

성종 5년에 영의정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고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 남은 여생을 유유자적하기 위해 한강 가에 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의 화려했던 정치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한명회 소유의 정자였던 압구정이라는 명칭은 한명회가 중국 문객 예겸에게 부탁해서 받은 것이었다. 한명회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예겸과 마주 앉아 시로서 서로 응대하던 차에 한명회가 예겸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예겸은 압구()라고 이름하고 또 기()를 지어 주었던 것이었다. 압구정이 완성되는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압구정시를 직접 지어 내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젊은 관료들의 반발로 철거되었다.

그런데 워낙 풍광이 좋은 터라 그 소식이 중국까지 알려졌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사신이 오게 되면 반드시 거치는 코스가 되었다. 1481년(성종 12년) 이때도 역시 중국 사신이 와서 압구정을 관람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는 좁다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방문을 거절하였으나, 계속되는 사신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방문을 허가하였다.문제는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한명회가 자신의 정자가 좁아서 중국 사신이 방문하여도 잔치를 열수 없다는 구실로, 국왕이 사용하는 차일을 청하였던 것이다.

“신의 정자는 본래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담당 관서를 시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 그러나 성종은 이를 허가하지 않고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경()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혐의하는가?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에서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보첨만( 처마에 잇대는 장막)을 청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다시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도록 하고 이를 불허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도 여기서 굴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 아내가 아파서 잔치에 나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단히 진노한 성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우리 나라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은 세종()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거둥하였다가 마침 신령스러운 비를 만났으므로 이름을 내리고 기문()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어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 승지나 대간의 비난이 한명회에게로 쏟아졌다. 이때마다 성종은 한명회의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성종도 한명회의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벼슬을 떠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로 지은 정자가 그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한명회의묘

 

한명회의 묘와 신도비는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 11-1에 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사()에 관련되었다 하여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1506년 신원되었다. 1487년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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