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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야사이야기

신臣 자를 쓰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다.

by 무님 2020.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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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시대에는 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올리면서 자기의 이름 앞이나 자기를 지칭하는 경우 반드시 신臣 자를 붙이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를 소홀히 하여 처벌을 받은 관리가 있었다. 태종 7년 12월에 파직된 안주 목사 홍유룡이다. 동지를 축하하는 글인 <동지하전>을 임금에게 올리면서 신 자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먼저 홍유룡의 하전을 본 의정부에서 그를 처벌하라고 주청 하자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무지한 무인이니 거론하지 말라."

이번에는 사간원이 나섰다.

"홍유룡이 무녀의 소생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고, 무예의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아첨하고 뜻을 맞추어 외람되게 직임을 받아 조정의 관원에 섞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게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이욕만을 자행하여 전라도 조양 병마사로 있을 때에 관물을 도적질 하였습니다. 그 근본 심술이 밝은 시대의 등용에 합당치 않습니다. 지금 지위가 가선대부에 올라 큰 고을을 맡았으니, 마땅히 공손하고 삼가해 전하께서 더러움을 포용하시는 덕에 보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홍유룡은 이것을 생각지 않고 신하의 예를 잃었습니다. 잘못을 깨닫지 못하면서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까?"

사간원은 법에 따라 홍유룡을 징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무리 신분이 천하고 무식한 자라도 신하의 예를 따르지 않음은 용서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사간원에서 이 정도까지 주청 하자 이금은 더 이상 두둔하지 못하고 파직시키라는 명을 내리고 말았다. 홍유룡은 파직된 후 곧 복직되어 전라도 병마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에도 전라도 경차관 이지강이 홍유룡의 잘못 몇 가지를 아뢰었다.

"이 소임을 감당할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지금 홍유룡이 범한 것은 모두 작은 잘못이다.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하다."

임금은 이번에도 용서하여 주었다. 얼마 후에 이지강이 다시 나서서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하였다.

"홍유룡은 직무를 부지런히 행하지 않으며, 육지에 관아를 지어 기생첩을 많이 거느리고 음탕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역마를 타고 자주 본가가 있는 고향에 왕래하였습니다."

 

진충귀 개국원종공신 녹권

 

임금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마지못해 홍유룡의 파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용서하여 전라도 수군도절제사에 임명하고, 말이나 비단을 하사하는 등 전보다 더 두터운 대우를 하였다.

홍유룡이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이유는 무인으로서 조선 건국에 참여한 개국 원종공신이며, 제1차 왕자의 난에서도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공신들은 원래 대역 모반 등 죽을죄를 짓지 않는 이상 대개 용서하도록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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