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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야사이야기

천인이 재상에 오른다

by 무님 2020.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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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여서 귀족이나 양반이 관리로 임용되고 노비 등의 천인은 절대 관리가 될 수 없었다고 다들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 건국 직후에는 각종 법규 등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해서였는지 천인이 관리가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조선 건국 직후 궁중에서 잡일을 하는 노비인 내노 이덕시가 의성고 별감, 한장우가 보화고 별감, 이생이 의순고 별감에 임명된 적이 있다. 정조 1년 10월 사헌부에서 공인, 상인, 노비 등에게 벼슬을 주지 말고 관직을 해임할 것을 청하였다.

"공인, 상인, 종들이 조정에 뒤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임금의 윤허를 받지는 못했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태종 때는 가죽을 다루는 장인이었던 임지의가 충청도 보령 감무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집안 계통이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천한 신분으로 재상까지 오른 인물오 있었다. 태조의 병을 잘 치료하면서 총애를 받아 검교승년부윤까지 올랐다. 검교는 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관직으로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명예직이긴 해도 엄연히 매월 봉급을 받는 정식 관원이었다. 거기에다가 승녕부의 윤이라는 직책은 종2품의 재상 신분이었다. 신분을 뛰어넘어 오직 의술로 고관까지 오른 것이다. 고관까지 올랐으나 양홍달은 너무 욕심을 부렸다. 직함만이 가지고 있는 명예직에 만족지 않고 일정한 직무가 있는 실직을 얻으려 했다. 실직에 제수하는 것을 지배라 하였는데. 이것만은 양반 사대부들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급기야 태종5월 11월에 사헌부에서 그의 관직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홍달은 천인인데 의술로 벼슬이 2품에 이르러 극진합니다. 마침내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먹고 있으니 직첩을 거두고 국문하십시오."

사헌부에서 관직 박탈만이 아니라 국문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임금은 그에 대한 총애가 남아 있어 다만 직위만을 빼앗는 것으로 그치게 하였다. 양홍달 외에도 처인으로 간주되던 맹인 승려가 판서까지 오른 경우도 있었다. 맹인 승려 유담은 법명이 선명이었는데, 점을 잘 쳐서 이름이 나 있었다. 태종이 검교호조전서라는 관직을 하사하였다. 전서는 판서와 같은 벼슬로 요즈음의 장관 자리이다. 명예직인 검교라 해도 맹인이 지금의 재정경제부 장관과 같은 관직에 올랐으니 놀라운 일이다. 공신에게 주는 훈직을 받은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가 무슨 일로 관직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태종의 상당한 총애를 받을 만큼 큰 공을 세웠던 것 같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그렇다고 신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사간원에서 총대를 메고 유담을 파직하라고 요청하였다. 태종 5년 1월 사간워에서 상소를 올렸다.

"우리나라의 검교직은 훈구지친으로 인해 있습니다. 이제 맹인 유담을 검교호조전서로 삼아서 점치는 사람을 훈친의 반열에 있게 하셨습니다. 벼슬을 마련한 뜻에 어그러질 뿐만 아니라. 후세에 벼슬로 상을 주는 공정함을 보이십시오, 만약 작은 공이 있다면 곡식과 비단으로 상을 줌이 옳습니다."

사간원의 요청을 접한 임금은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다시 청하자 마지못해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을 내렸다. 유담의 관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공로가 있는 사람이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우대한 태종의 개방적인 성격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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