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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성종의 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

by 무님 2020.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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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는 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비(). 성은 한씨 (). 본관은 청주(). 서원부원군 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치인 ()의 누이동생이다.

소혜왕후(, 1437-1504)라는 시호 보다 인수대비()로 유명한 한씨는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왕실여성이며, 여성 지식인이다. 조선 제9대왕 성종의 어머니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더욱 유명한 인수대비는 시아버지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몸소 지켜보았고,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 자리를 대신해 자신의 어린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들면서 대비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훈()]이라는 여성 교육서를 만든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 1403~1456)의 6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청주 한씨 가문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머니 홍씨는 그녀의 나이 13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인수대비의 집안 배경은 그녀가 왕실과 혼인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녀의 고모 2명이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었던 것이다. 부친인 한확은 순창군수 한영정의 아들로 그의 누이는 명나라 공녀로 갔다가 명 성조()의 후궁이 된 여비()이다. 말하자면 인수대비 한씨의 큰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셈이다. 한영정의 맏딸이었던 여비는 사대부가의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 공녀가 되었으나, 명 성조의 눈에 들어 후궁까지 된 여성이다. 여비는 1424년 성조가 죽자 순절(- 충절이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하였다고 전하는데, 실제로는 처형과 다름없는 자살이었다.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선종() 또한 한영정의 막내딸 즉 한확의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삼았다. [세종실록]에 보면 당시 한확이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모가 뛰어난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있지 않다가 명나라 황실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인품의 소유자라 전해지지만,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평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55년(세조 1)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세자가 횡사하였다.

1469년 11월 28일 자을산군, 즉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 머물던 한씨도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청상과부가 되어 궁궐을 떠난 지 12년만이었다. 정희왕후는 학식이 깊은 한씨에게 수렴청정을 수차례 양보하였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의 치세 기간에 인수대비 한씨가 끼친 정치적 영향은 매우 컸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의경세자의 위호(- 벼슬의 등급 및 그 이름)와 어머니의 위상 문제가 대두되어 성종 1년에 의경세자의 시호를 온문의경왕()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를 인수왕비()로 하여 예종비와 인수왕비를 형제의 서열로 차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인수대비는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덕종비()가 되었다. 사실 인수대비는 생전의 존칭이었고, 죽어서는 소혜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지금까지 인수대비는 소혜왕후라는 시호 외에도 인수왕비, 인수왕대비, 덕종비, 회간왕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인수대비는 왕실 어른으로서 늘어가는 왕실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1475년(성종 6)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내훈]의 서문을 보면 왜 인수대비가 이 책을 편찬하려 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같은 마음의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이 때문에 [소학] [열녀] [여교] [명감] 등 지극히 적절하고 명백한 책이 있으나 복잡하고 권수가 많아 쉽게 알아 볼 수가 없다. 이에 이 책 가운데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뽑아 일곱장으로 만들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인수대비는 이 책에서 부인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도를 높이고 부부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유교 덕목을 실어 여성도 유교적 도리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수대비의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비()와의 관계는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 윤비는 왕비가 된지 8개월 만에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났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윤비의 폐비와 사사 문제를 원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인수대비 또한 폐비 윤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윤호의 딸 파평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는 대비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인수대비는 “이제 중궁다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기뻐했다.

며느리를 죽이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인수대비는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갔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광폭함을 누차 지적하고 타일렀으나 오히려 원망만 살 뿐이었다.

 

연산군은 부친의 후궁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엄숙의()와 정숙의()를 궁 안뜰에 결박하고서는 아들인 안양군 항과 봉안군 봉을 불러 모친들을 때리게 만들었다. 이어서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술잔을 드리게 하니, 인수대비가 놀라 잔을 받았다. 연산군은 큰소리로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하며 분노했다. 연산군은 엄숙의·정숙의를 죽인 뒤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을 담그고 산과 들에 흩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인수대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 어느날 연산군이 찾아오자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며 분노했다. 이 말에 흥분한 연산군은 자신의 머리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몸을 들이 받았다. 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약한 인수대비는 연산군과의 갈등과 마찰 속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할머니의 죽음에 이르러서도 슬퍼하기는커녕 3년 상까지 폐지할 정도로 원한을 품었다.

 

덕종과 소혜왕후의 묘

 

인수대비 능은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면 서오릉(西)에 덕종과 합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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