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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연산군 일기

by 무님 2020.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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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는 조선왕조 제10대 왕 연산군의 재위기간 1494년 12월에서 1506년 9월인 11년 9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모두 63권 46책이며, 활자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연산군은 반정으로 폐위되었으므로 묘호가 없고, 그 실록도 노산군(단종), 광해군의 예와 같이 일기라고 칭하였으나, 체제나 내용 면에서 다른 실록과 별로 다름이 없다. <연산군 일기>의 편찬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나자 1506년인 중종1년 11월에 시작되었다. 폐위된 왕의 실록 편찬이므로 일기수찬이라는 이름으로 일기청이 설치되고, 대제학 김감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1월에 김감이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므로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으나 후임 대제학 신용개가 감춘추관사가 되어 재개되었다. 그러나 3개월 뒤 연산군 때 은총을 받은 인물을 교체해야 한다는 의정부의 건의로 편찬관이 교체되었다.

이에 따라 편찬 책임자로서 총재관 성희안 이하 도청 당상 2명, 각방 당상 4명, 색승지 1명이 다시 임명되어 본격적인 편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연산군일기>의 내용

연산군의 이름은 융이며,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1483년 성종14년 세자에 책봉되었고, 1494년 12월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일기>는 무오사화로 인한 후유증 및 연산군의 사관에 대한 탄압으로 대다수의 자료가 유실되었으므로 그 내용이 매우 간단한 면이 많다. 그러나 성종 대로부터 이어내려오는 기성세력과 신진세력과의 갈등, 또 궁중세력과 부중세력과의 충돌, 무오.갑자의 양대 사화, 그리고 연산군의 호화 방탕한 생활기록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에는 다른 실록과 달리 사론이 극히 적어 25개 정도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왕 및 왕에게 총애를 받은 사람들의 비행에 대한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는 무오사화가 일어난 왕 4년 이전까지는 왕도정치, 도승 및 사원전. 내수사장리 문제 등에 대한 대간들의 상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년 이후 갑자사화가 일어난 왕 10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가 반반을 차지하고, 그 뒤 폐위까지는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관된 인물들의 치죄와 연락에 관한 왕의 전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대명관계는 극시 소략하나 야인의 회유. 정토 문제와 왜인의 토산물 진봉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왕이 시문 및 그에 화답한 관료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림파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에 대해서는 간략한 사실만 기록하였다. 이에 비해 총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사론의 형태를 취해 많은 비판을 첨가하고 있다.

 

 

연산군 태실이야기

 

연산군은 적자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태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위치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단, 최근에 연산군 태실에 관한 반가운 논문이 한편 나왔다.

경기도 파주 탄현면 축현리에 있는 태실이 연산군 태실로 추정된다는 차문성 [파주 축현리 태실과 연산군 태봉의 연관성에 관한 고찰] 이라는 논문이 <파주연구> 제 9호(2015년)에 발표된 것이다. 차문성 파주 문화원 연구원은 축현리 태실의 위치와 누구의 태가 묻혔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표조사를 하던 중 놀라운 발견을 한 것이다.

축현리 태실은 도굴된 상태로 1982년에 매장문화재로 신고가 되어 발견되었다.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측에서 석함의 주인을 모른 채 태함만 수습해갔고, 현재 태실 석함의 옹석(甕石)은 국림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먼저 9대 임금 성종, 10대 연산군, 11대 중종 대의 장태 상황을 살펴보자.
조선왕실에서 태실을 조성할 때는 대부분 풍수가 좋은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길지를 찾았으나,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에 조성됐다. 그후 <조선왕조실록>의 성종 7년(1476년) 11월 28일 기록을 보면,
'대길한 응험이 없으니, 풍수의 설은 허탄하다고 할수 있다. 하였으니, 그 안태할 만한 땅을 경기에서 고르도록 하라' 고 어명이 내려졌다.  성종의 둘째 아들 중종의 태실이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에 있는 것도 성종의 어명과 연관성이 높다. 당시의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1476년 11월 7일 태어난 성종의 큰 아들 연산군의 태실은 경기도 파주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1750년대의 <해동지도>를 보면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에 태봉의 위치가 나와 있는데, 월롱산으로 이어진 줄기에 '태봉(胎峰)이란 글씨가 뚜렷이 보인다.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이와 함께 1851년의 <대동여지도>에는 월롱산에서 이어진 줄기에 '축현리'라는 글자가 쓰여 있어 지도상의 '태봉'이 바로 축현리 태봉인것을 알 수 있다. [파주시 축현리 태실과 연산군 태봉의 연관성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읽고 엉덩이가 들썩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6년 3월 5일 파주문화원 향토연구소 연구위원 5명과 함께 현장 답사를 가 보았다.  과연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 반신반의하며 현장을 찾았다. 축현리 태실은 덕흥대원군 집안 소유로 축현리 산 96-1번지 태봉골에 있다. 이곳에는 무덤이라고는 아무리 봐도 진성군(진성군 1595~1655년)의 묘소 밖에 안보이고 주변은 야산이다. 이 일대는 관리 부실로 황폐화되어 있다. 그런데 차 연구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문석인(文石人)이 엎드려 있다. 이곳이 태실지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면 그냥 지나칠 만큼 땅속에 묻혀 있다.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태실도 파괴된 것이라 추정된다.
*.문석인 - 능 앞에 세우는 문관의 형상으로 만든 돌.
*.진성군 - 선조의 조카

이곳 축현리 태실이 연산군 태봉이었을 것이라는 근거는 왕의 태실을 가봉(可封)했다는 증거가 되는 연엽동자석, 사방석, 상석(裳石)의 일부가 보인다는 점이다. 연엽동자석은 왕의 태봉에만 쓰이는 것이다. 조선의 임금 중에 태실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은 연산군, 인조, 효종, 고종의 태실이 있는데 이 축현리의 태실이 이 가운데 하나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와 함게 축현리 태실이 연산군 태실이라는 또 다른 근거는 이곳의 문석인이 조선 전기에 사용되던  '북두공복'형식이라는 점이다.

*.복두공복(㒒頭公服) - 문석인의 형상을 가리키는 말. 문석인이 홀(笏)을 맞잡은 손을 소매 안에 넣고 있는 형상이다.

문석인은 조선 전기에는 복두공복 형상으로 세워지다가 조선 후기로 가면서 '금관조복'형상으로 바뀌었다. 이 문석인을 보아 축현리 태실은 임진왜란보다 앞서 조성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발발하기 이전에 즉위한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태실지가 발견되지 않는 임금은 연산군이 유일하다. 그리고 축현리 태실지에 진성군의 묘가 쓰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유추된다.

단종이 폐위된 후 단종의 태실은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그리고 명당 자리인 단종 태실지에는 다른 사람의 묘가 들어섰다. 마찬가지로 연산군도 폐위된 후 연산군 태실은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의 태실이 있던 이곳은 명당자리인 만큼 선조 대에 이르러 진성군이 묘를 썼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축현리 태실과 연산군 태봉의 연관성을 다시 한번 정리해본다.

첫째, 태봉의 석물이다. 문석인이 복두공복이고, 연엽동자석 등이 보인다.
둘째, 위치다. 성종이 경기도에 태실을 조성하라는 전교를 내렸고, <해동지도>등 옛 지도에서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태봉의 위치가 확인된다.
셋째,시대이다. 진성군묘 이전에 조성된 태실이라는 점이다.

 

 

연산군 금표비

 

현재 연산군의 태실 추정지는 덤불에 가려있고, 석물의 일부만 드러난 채 방치된 상태이다. 우선 더이상 손상되지 않도록 현장 보존이 시급하고, 향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태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지기를 바란다.
파주시 측에서 축현리 태실 등 비지정 문화재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져주고, 보존 발굴에 나서주었으면 좋겠다. 서울 방학동에는 '연산군묘'(사적 제 362호)가 있고, 고양시에는 1994년 발견된 '연산군금표비'(경기도 지방문화재 제88호)가 있다. 연산군금표비가 발견된지 20여년이 흘렀는데, 파주 축현리 태실이 연산군 태실지라는 것이 확인 된다면 무관심 속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연산군 관련 유물이 또 늘어나는 것이다.

 

 

연산군금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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