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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예종, 성종 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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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안대군 - 1466(세조 12)∼1525(중종 20). 조선 전·중기의 왕자이다.

이름은 현(). 자는 국보(). 예종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안순왕후 한씨()이다. 4세 때 부왕인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의 제1후보자였으나 세조비인 정희왕후()가 아직 어리고 총명하지 못하다고 반대하여 대신 성종이 예종을 이어 왕위에 즉위하였다.

1470년(성종 1) 5세의 나이로 제안대군에 봉해져 녹봉(祿)과 직전()을 지급받았으며, 후일 세종의 제 5자인 평원대군 임()의 후사로 입양되었다.

12세에 사도시정 김수말()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어머니 안순왕후에 의하여 내쫓긴 바 되어, 14세에 다시 박중선()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김씨를 끝내 못잊어하자 1485년 성종이 복합()을 허락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안순왕후의 상을 입은 뒤부터는 홀로 거처하였으며,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다만 성악()을 즐기고 사죽관현()을 연주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연산군이 네 차례나 음률()을 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으나 따르지 않았다.

『패관잡기()』에는 그를 평하여 “성품이 어리석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진실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감춘 것”이라는 또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결국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세력과 훈신()의 각축 속에서 희생된 인물이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2. 강순 - 조선전기 조전절제사,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곡산(). 자는 태초(). 증조부는 판삼사사() 강윤성()이다. 갑사()로 벼슬에 나가 무관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첨지중추원사로 있다가, 북방 야인을 다스리기 위해 조전절제사(使)로 박천에 나가 북방의 방어에 전념하게 되었다. 1454년(단종 2) 회령도호부사(使)를 거쳐 판의주목사로 전임되었다가, 1458년(세조 4) 다시 첨지중추원사로 복귀해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세조 6) 판길주목사로 부임했다가 새로 설치된 영북진()의 도호부사로 전임되어 진()의 성을 쌓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 뒤 신숙주()의 모련위야인정벌()에 종군해 공을 세우고, 자헌대부에 올라 종성절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뒤, 1465년(세조 11) 중추원사로 전임될 때까지 5년 가까이 북방 방어에 힘쓰면서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세조는 북방 방어에 노력하는 노고를 덜어주려고 처와 함께 부임하도록 특명하였다.

또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을 때는 임기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믿고 교대시킬 더 좋은 인물이 없음을 들어 그대로 유임시키기도 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진북장군()으로 평안도 병사를 이끌고 어유소()·남이() 등과 함께 홍원()·북청()·만령() 등지에서 반란군을 격파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 1등에 녹훈되고 우의정 산양군()에 제수되었다.

이어 서정장군(西)으로 남이·어유소 등과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의 동북쪽 파저강()올미부()의 여러 곳을 소탕하고 추장 이만주(滿)를 죽이는 등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명나라 헌종()으로부터 은 20냥과 비단을 하사받았다.

1468년(세조 14) 7월 오위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예종 즉위년) 10월 유자광()의 무고로 일어난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당하였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의 건의로 누명이 풀리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3. 구치관 - 조선전기 우찬성,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능성(). 자는 이율()·경률(). 증조는 보문각대제학 구위()[구치관 에는 ]이고, 할아버지는 개성부윤 구성로()이며, 아버지는 목사 구양()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감찰·황해도도사를 거쳐서 병조정랑·검상·사복시윤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의 명으로 함길도에 파견되어 경성부사 이경유(耕)를 참살하고 보공대호군()에 승진되었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우승지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이후 이조참판으로 승진되고 능성군()에 봉해졌다. 1462년에 우찬성, 뒤에 능성부원군()에 봉하여지고 우의정을 거쳐서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건주위()의 여진족이 변경을 침범하자 진서대장군(西)이 되어 이를 토평하였다. 특히, 세조는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매우 신임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으로서 호조판서를 겸직하였으며, 1469년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원상으로서 이조판서를 겸직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좌리공신() 2등에 추록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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