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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인조의 며느리, 소현세자의 비 민회빈 강씨

by 무님 2020.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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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 강씨는 본관 금천(). 우의정 강석기()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가례()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세자와 함께 인질로 심양()에 잡혀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1627년,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는 강석기의 딸을 최종 세자빈으로 간택하여 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사실 강씨는 본래 세자빈이 되지 못했을수도 있었다. 그녀가 간택되기 2년 전, 소현세자는 파평 윤씨 가문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 규수는 이괄의 난에 가담한 윤인발과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결국 파혼당해 내쳐지게 되었다. 이후 소현세자의 혼례가 무산된 지 2년 만에 다시 간택을 거쳐 뽑힌 여인이 강빈이다. 이후 병자호란의 패배와 정축하성으로 인한 삼전도의 굴욕으로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자 동행하여 청 심양까지 가게 되었다

 

보통의 세자빈이었다면 궁 안에서 가만히 앉아서 지냈겠지만, 강빈은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1640년, 소현세자가 29세가 되던 해에 청나라의 숭덕제(청 태종 홍타이지)가 소현세자 일행의 생활비가 부담된다 하여 소현세자에게 20만평 가량의 허허벌판 땅을 거의 반 강제로 주면서 농사지어서 먹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 세자의 수행원(익위사)들은 이를 세자를 고국으로 영영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수작이 아닌가 우려했으나 현실적으로 거부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농사 지을 인력이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이를 홍타이지에게 묻자, 홍타이지는 "조선에서 사람을 데려오든 뭘 하든 알아서 충당하라"고 했다. 그때 강빈은 우연히 심양 시내에서 노예 시장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현세자를 설득하여 그들을 돈주고 구해낸 뒤, 심양 근교에 농장을 세우고 그들을 그 농장에서 일하게끔 했다.
농장 경영은 거의 전적으로 강빈이 주관했던 걸로 보여지며, 농장에서 얻은 이득으로 소현세자는 청나라 고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잦은 선물 요구를 만족시키고 나름대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는 밑천이 되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소현세자 16세, 강빈 17세에 혼인하여 각각 18세, 19세 되던 해 첫 아이를 낳았는데 어려서 죽은 군주(群主) 둘을 포함해 총 8남매를 낳는다. 이들 중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막내 경안군 이석견과 경녕군주밖에 없으니 참 자식 복도 없는 여인이였다. 여하간 볼모 생활 중에도 세자관에 아이 울음소리가 끊어지는 날이 없었지만 경완군 석린이 조선으로 보내져 조선에서 자란 점을 생각하면, 현지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조선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갔다가 1644년에 돌아왔다. 소현세자와 영구 귀국한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 정묘호란&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 등으로 인조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 권력의 중심에 서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 이후 인조로부터 노골적인 박대를 받다가 귀국 2달 만에 독살인지 의료사고인지 알 수 없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지금도 소현세자의 죽음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일단 확실한 팩트로만 나열하자면 왕의 주치의(이형익)가 세자에게 침을 놓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것이다. 뒷날 인조도 그의 침을 맞고 사망하는걸 보면 능력없는 한의사가 병약한 세자와 만나 발생한 의료사고가 유력한데 어쨌든 소현세자를 지워버리는데 성공한 인조는 소현세자 가계를 아예 대통(大統)에서 배제할 결심으로 강빈과 세자의 아들들까지도 제거하기로 작정하였다.

소현세자 사후 궁내에서 소용 조씨를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이는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었으나, 인조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것을 강빈을 제거하는 도구로 활용하여 강빈의 궁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강빈은 후궁 별당에 감금했다. 그러나 인조의 의도와 달리 세자빈의 궁녀들은 이때 고문사까지 당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도 강씨가 저주를 했다는 거짓을폐 자백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646년 1월에는 시아버지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의 독살 미수라는 역모급 사건이었던 것이다. 근데 이때 인조의 대처가 상당히 이상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신하들에게 알리거나 의금부나 형조에서 조사하여야 정상이나, 정작 인조는 1월 3일에 궁궐 내에서 내시를 통해 자체적으로 조사를 벌인다. 이것만으로도 정상이 아닌데, 조사 과정에서 수라를 만드는 왕의 궁녀들보다 세자빈 강씨의 궁녀들을 더 많이 잡아 고문까지 하며 조사하기 시작한다. 신하들이 이 사실을 알고 공식 조사를 하자고 요청했지만, 인조가 이를 거부하다가 신하들의 계속된 요청에 1월 11일에야 뜻을 꺾고 의금부에서 공식 조사를 시작한다. 이쯤 되면 처음부터 강씨를 노리고 한 조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의금부가 한달 동안 조사했지만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세자빈의 궁녀를 포함한 용의자들도 고문을 당해도 끝까지 자백하지 않아서 고문사하는 일이 벌어진다.이렇게 무리해가며 조사를 했는데도 증거가 안 나오자 인조는 아예 누명을 씌우기로 작정을 하고 활동에 나선다. 음력 2월 3일에 인조는 비망기를 통해서 조사를 하던 신하들을 압박한다.결국 1646년 3월 15일, 36살의 강빈은 조씨 저주 사건과 인조 독살 음모를 저질렀다는 죄목 및 강빈이 일전에 대전으로 와서 큰 소리로 자신을 못 살게 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외친 죄목 등으로 세자빈 자리에서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난 뒤 사사 당했다.

 

결국 억울하게 죽어 간 그녀는 효종, 현종 대에는 '역강(逆姜 : 역적 강씨)', '강적(姜賊 : 강씨 성의 도적)' 등으로까지 불리다가, 효종 이래 효종계의 3대째 계승에 성공해 정통성이 많이 확충됐고 더이상 강빈의 위치가 역적인지 아닌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신원될 수 있었다.

민회빈 강씨에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소재하고 있다.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었으며 아왕릉()이라고도 하며, 지정면적은 2,182㎡이다. 죽음과 함께 폐서인()이 되어 서민의 신분으로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무고()함이 판명되어 복위되고, 복원묘()를 만들어 민회묘라 부르다가 1903년(고종 7)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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