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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정명공주

by 무님 202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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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공주는 선조의 첫째 딸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김제남()의 딸 인목왕비()이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영창대군을 역모 연루죄로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폐출시킬 때 함께 감금되었다. 인조반정 후 공주로 복권되고 중추부동지사 홍원의 아들 주원에게 시집을 갔다. 인목대비가 죽은 후 궁중에서 무도한 백서()가 나와 효종의 의심을 받았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후대를 받았다.

 

정명공주가 쓴 <화정>

 

1602년 음력 7월 13일 선조가 김제남(, 1562~1613)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니 그녀가 인목대비(, 1584~1632)이다. 당시 선조의 나이 51세, 인목대비의 나이 19세였다. 열 달 후인 1603년 음력 5월 19일 정릉동 행궁에서 정명공주가 태어났다

정명공주가 태어난 지 3년 후인 1606년(선조 39) 영창대군(, 1606~1614)이 태어났다. 55세의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얻은 선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선조가 언제 자신을 내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1608년 선조는 즉위한 지 41년 되던 해에 승하했다. 영창대군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였으므로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잘 돌봐 달라는 유명()을 남겼다.

광해군은 34세의 나이에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광해군은 선조가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영창대군을 본체만체했다. 하지만 정명공주는 받들어 올렸다.

1614년 2월 영창대군은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 김제남의 뒤를 이어 처형당했다.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광해군은 자식이면서도 친자식을 죽인 원수였다. 두 사람은 한 궁궐 안에서 함께 지낼 수 없었다. 1615년(광해군 7년) 4월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두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격하한 후 경운궁에 유폐했다. 경운궁(옛 정릉동 행궁)은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의 서쪽에 있어 서궁이라고도 불렸는데, 인목대비를 후궁으로 낮추면서 그녀의 궁호도 ‘서궁’으로 정해졌다. ‘서궁’은 경운궁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창덕궁 서쪽에 있는 후궁’을 의미하게 됐다. 광해군은 ‘서궁’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 주변에 높은 담장을 쌓고 초소를 두어 무관에게 감시하도록 했다.

정명공주도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었고, ‘공주의 봉급과 혼인은 옹주의 예에 의한다.’라는 폐비절목()에 따라 옹주로 강등되었다. 폐비절목의 규정은 예외적인 조항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실상 서인()으로 강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절망에 빠진 인목대비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은 딸 정명공주뿐이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공주의 소식을 물어올라치면 “이미 죽었다.”라며 둘러댔다.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남자가 쓰기에도 힘에 부친다는 한석봉의 필법을 수련하는 데 정진했다.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된 동안 ‘화정’을 비롯한 많은 서예 작품을 썼다. 모녀가 처한 비극적 상황은 정명공주를 조선 최고의 여류 서예 작가 반열에 올려놓는 바탕이 되었다.

[화정]은 글자 하나의 사방이 각각 73cm나 되는 대작이다. 연약한 여성의 체력으로 이런 글씨를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술사가로부터도 타고난 명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문한()은 부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라는 유교적 습속 때문에 정명공주는 자신의 작품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이 때문에 정명공주가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다는 사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화정]은 정명공주가 죽은 후 막내아들 홍만회(, 1643~1709)가 물려받았다. 홍만회는 혹시라도 [화정]이 사라질까 두려워 여러 벌의 탁본을 떠서 친인척과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그들 중 남구만(, 1629~1711)에게는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서인 세력을 등에 업은 인조는 광해군이 명을 배신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이고, 정원군은 선조가 총애했던 신성군의 동생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에게 즉위 교서를 내려 인조반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존호를 복원한 인목대비는 공주로 복권된 정명공주와 서궁 유폐 생활을 끝내고 창덕궁에 들어왔다. 인조는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으므로 인목대비와 나이 어린 고모 정명공주를 깍듯이 대우했다.

21세였던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되어 있느라 하가()하지 못한 상태였다. 인목대비는 정명공주의 혼사를 서둘렀다. 반정이 성공한 지 나흘밖에 지나지 않은 1623년 3월 16일(음력) 예조()에서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을 속히 시행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인목대비의 마음을 헤아린 인조가 이를 즉각 허락하면서 부마 간택이 급물살을 탔다. 8월쯤 혼례를 치르기로 계획하고 부마 단자()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기한이 다 되도록 겨우 아홉 명만이 단자를 올렸다. 무엇보다 공주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명의 나이가 21세였으므로 부마의 나이는 적어도 20세 내외가 되어야 하는데, 그 정도 나이의 남자들은 대부분 혼인한 상태였다. 어쩔 도리 없이 정명공주의 부마 단자 접수 기간을 늦추고 나이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정에서 벗어난 음력 8월 11일에야 초간택을 치러 아홉 명을 선발했고, 음력 9월 12일 재간택을 거쳐 중추부동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 1606∼1672)을 부마로 간택했다. 홍주원의 나이는 정명공주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 18세였다. 음력 8월에 치르기로 했던 혼례는 음력 12월 11일에야 비로소 치러졌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에게 정명공주의 결혼은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행사였다. 정명공주의 결혼은 인목대비와 인조의 배려 속에 이루어졌다. 인조는 정명공주의 신혼집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안동별궁에 마련해 주어 정명공주가 궁궐을 출입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1632년(인조 10년) 인목대비는 49세의 나이로 인경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인조는 인목대비의 초상을 치르는 데 열중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졌다. 인조가 초상을 치르던 중 인경궁에서 백서삼폭()이 발견되었다. 비단에는 “왕을 폐위하고 세우는 일과 같았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인조는 인목대비가 자신을 폐위하고 다른 누군가를 왕으로 세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인조의 의심은 선조의 유일한 적통 정명공주에게까지 미쳤다. 인조는 몸이 아플 때마다 특유의 의심증이 도져 결정적 증거가 없는데도 정명공주가 자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공주를 핍박했다.

1639년(인조 17) 인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인조는 자신이 이번에도 저주로 인해 병에 걸렸다고 믿고 저주물()을 찾게 했다. 때마침 원손()이 거주할 향교동 본궁에서 저주할 때 쓰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인조는 사건의 배후로 정명공주를 지목했다. 하지만 최명길을 비롯한 대신들은 정명공주의 일이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반정공신에게 정명공주는 반정의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저주 의혹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과 같았다.

인조와의 10년간의 밀월이 인목대비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고, 정명공주는 17년 동안 악몽을 꾸어야 했다. 악몽은 인조가 승하하고 나서야 지나갔다. 그 후에도 정명공주는 36년을 더 살았다.

정명공주는 천수를 누리고 83세에 세상을 떴다. 숙종은 정명공주가 죽어서도 예우를 다했다. 실록에도 ‘숙종이 정명공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녹봉도 3년을 기한해 그대로 주도록 했다’라는 대목이 따로 나올 정도다. 정명공주와 거의 동시대를 함께했던 송시열(, 1607~1689)은 정명공주의 묘지()에 이렇게 썼다.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 오복을 향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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