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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인조시대 관련 사건 - 이괄의 난

by 무님 202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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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괄이 1624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한때 한양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반란군 내부의 분열과 관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광해군(, 재위 1608~1623) 때에 제주목사, 함경도 북병사(使) 등을 지낸 이괄(, 1587~1624)은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인조(, 재위 1623~1649)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북병영의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신경유()의 권유로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며, 거사 당일에도 반군을 통솔하기로 했던 김유()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군사를 지휘하여 반정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시 반정 세력이 병력을 이끌고 홍제원()에 모였을 때 김유가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망설이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자 이괄이 대장으로 선출되어 병력을 편재했으며, 김유가 뒤늦게 나타나자 그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이괄은 반정이 성공한 뒤에 임지로 돌아가지 않고 좌포도대장으로서 한성부()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하지만 김유, 이귀() 등 서인(西) 공신들은 이괄을 배척하고 견제하였다.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도 이괄은 김유와 이귀, 김자점() 등보다 한 등급 아래인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는 데 그쳤다. 그리고 반정 이후 2달여 만에 후금()이 침입할 우려가 있다 하여 도원수() 장만()의 추천으로 평안병사(使)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관서(西)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괄은 평안도 영변()에 주둔하면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북방 정세와 부원수 임명 경위 등으로 보아 미흡한 점이 많다. 당시는 후금의 강성으로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매우 긴박한 정세였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장만()의 도원수직 못지 않게 부원수직은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임무로서 전략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인물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이괄의 택정은 그만큼 신중한 배려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괄 역시 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출진한 뒤에 군사조련, 성책() 보수, 진()의 경비 강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에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은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반역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그 피해자의 하나였다. 1624년 1월에 문회()·허통()·이우() 등은 이괄과 아들 전(), 한명련()·정충신()·기자헌()·현집()·이시언()이 불측한 생각으로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져 조사 담당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층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진상을 국문하고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를 하였다.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는 묵살하였으나, 군중()에 머무르고 있던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냈다.

이에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조정의 사자(使)들을 목베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사전 계획에 의한 반란이라기보다는 집권층의 의구심에 의한 우발적인 반란이었다. 즉, 난의 원인은 이괄 자신 못지않게 집권층의 잘못으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작전에 능한 인물로서 이 후부터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월 22일 이괄은 항왜병()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휘하의 전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하였다.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하고 샛길로 곧장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당시 장만은 이괄의 반란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휘하의 군사가 수천 명에 불과해 이괄의 정예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괄의 반란군은 개천·자산 등지를 거쳐 26일에는 강동의 신창()에 주둔하고, 28일에는 삼등()을 지나 상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괄군이 관군과 처음 접전하게 된 곳은 황주 신교()에서였다. 이괄은 이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인 박영서()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돈()을 능지처참하였다. 이괄은 서울로의 진격을 쉬지 않았다. 그의 행군 속도는 무척 빨라 관군측에서는 소재조차 확인하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이괄은 평산에 관군의 방비가 엄한 것을 알고 봉산 고읍()에서 전탄()을 건너 샛길로 진군시켜 마탄( : 예성강 상류, 지금의 )에서 또 한차례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괄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을 지키고 있던 관군을 기습공격해 붕괴시켰다.

이에 인조 이하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공주로 피난하였다. 2월 11일 이괄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들로 하여금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행정 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이 무렵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 숙의 끝에 지형상 유리한 길마재[]에 진을 쳤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이괄은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관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날 밤 이괄·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 : 지금의 )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로 달아났다. 관군의 추격으로 이괄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이괄과 한명련 등은 그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이괄 등의 수급()이 공주의 행재()에 이른 뒤 인조는 22일 환도하였다. 인조는 환도한 뒤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 등 32인을 진무공신()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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