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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의 23대 왕 순조 < 이공 >

by 무님 2020.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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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이공은 이름 공(). 자 공보(). 호 순재(). 묘호는 당초에 순종()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가 바쳐져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의 딸 수빈()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조선 23대 왕 순조

 

 당시 조선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영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1805년 사망시까지 자신의 친정인 경주 김씨 노론 벽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뒷배로서 수행했고 신유박해  천주교 박해 사건을 크게 일으키기도 하여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내(상산군부인 송씨)까지 천주교를 통해 역모로 몰아서 죽이기도 한 사람이 바로 정순왕후 김씨다. 이후 순조의 장인이자 한때 정조의 충신이었던 노론의 온건 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安東 金氏)가 이들을 몰아내고 60년 장기 집권의 서막을 연다. 이른바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이후 세도정치는 무너져가던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순조의 치세에는 난세의 시작이었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1832년에는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물론 이전에도 다른 이양선이 왔지만 교역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순조는 뒤에 즉위하는 헌종, 철종과는 달리 나이나 혈통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므로 순조 본인의 권한은 강한 편이었고 정치적 판단 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죽음으로써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도 재위 기간 내내 을 달고 살게 되었는데다가 홍경래의 난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지독할 정도의 무기력함을 보인다.
순조는 즉위 초까지만 해도 노론 벽파 숙청에 앞장서는 등 상당히 의욕적이었고 순조 11년(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진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

 

그르미 그린 달빛 속  <순조>



홍경래의 난까지 터진 다음엔 김재찬, 남공철, 심학규, 이시수 등 노회한 신료들이 가득 차 있는 비변사에 국정의 대부분을 맡기면서 세도 가문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김조순이 살아있던 시절엔 김재찬 등 안동 김씨의 입김이 닿는 대신들을 통한 간접적 막후 통치를 했으나 순조 32년 김조순 사후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안동 김씨가 아예 모든 것을 다 먹어버리는 우리가 아는 방식의 세도 정치가 된다.
남인, 벽파 숙청은 홍경래의 난 이후 순조의 업무 거부가 겹치면서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참사로 이어졌다.

 

아들 효명세자가 매우 영특해 순조 나름대로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신하들 앞에서 스스로 무능한 임금임을 자처하며 세자에게 양위 선언을 여러번 하기도 하였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대개 양위니 대리청정이니 소리가 나오면 온 나라가 뒤집혀서 전교를 거두어달라는 결사반대를 외치곤 하지만,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온 신하들의 종사(宗嗣)의 무궁무진한 복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효명세자는 똑부러진 일 처리로 무너져 가던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으며 신하들과 순조의 기대를 한몸에 샀지만 불과 2년 좀 넘어서 병에 걸려 일찍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의 두 딸도 사망했는데, 이로 인한 충격 탓인지 다리에 난 종기가 악화되어 순조도 얼마 후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왕위는 순조의 장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8살 헌종이 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병으로 건강은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한의학자들은 순조의 증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홧병이라고 본다. 이때 재야에 있던 정약용을 불러다가 치료를 하려 했으나 정약용이 미처 오기도 전에 사망했다. 효명세자가 위독할 때에도 너무 늦어서 정약용이 오기 전에 사망한 적이 있었다.

 

순조 말년엔 안동 김씨에 거슬리는 벽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추사 김정희 아버지인 김노경 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조가 안동 김씨를 제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조 32년 이후의 실록은 김조순의 장남 김홍근이 군국의 사무를 맡았다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었으며, 다음 해 음력 11월 28일에는 창덕궁 대조전을 포함한 궁 전체가 인조반정 이래 최초로 깡그리 불타버렸다. 1803년 이미 인정전이 소실되어 다음 해 복구한 상황이었다. 1820년에 그려진 동궐도는 이 불타기 전의 창덕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순조 개인은 국정을 위한 연감인 <만기요람>(萬記曜覽)을 편찬하는 등 그다지 무능한 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지런함과 물려받은 재능에도 불구, 무엇보다 세도 가문에 적극적인 견제를 할 의지가 없었다.

순조는 1834년 11월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으나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서학(천주교(가톨릭))을 탄압해 이단을 물리쳤다는 이유로 철종 8년(1857)에 순조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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