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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쇄퇴의 시작 < 세도정치 >

by 무님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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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란 조선후기 특히 19세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이다.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볼 때 국정의 정점에 있어야 할 국왕의 권력과 권위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세도()란 ‘세상 가운데의 도리’란 뜻으로서, ‘그 도리를 이끌어나갈 책임’을 함께 뜻하기도 했다. 세도의 책임은 원래 국왕에게 있어야 하지만, 조선후기에 신료의 발언권이 강해짐에 따라 유학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산림()이 세도의 담당자로 지목되곤 하였다. 19세기의 권세가는 위와 같은 논리에서 합리화되었으며, 그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비판하던 황현(), 안확() 등의 논자들이 세도()를 세도()로 바꾸어 표현함에 따라 세도정치의 용어가 성립하게 되었다. 국왕의 외척 인물들이 권력을 장악했던 순조·철종대의 정치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나, 고종대 흥선대원군과 여흥 민씨 척족의 국정 주도를 포함시켜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과 여흥 민씨의 국정 주도는 왕실의 외척 인물이 선왕의 유촉을 받아 세도를 자임한 앞 시기 정치의 전형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정조 이전 때 홍국영이 세도 정치를 하기 전의 세도(世道)는 단순한 정치권력보다는 어떤 지도이념과 공정한 언론을 주체로 하여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잡으려는 사상적·도의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학식이나 덕망을 가져야만 되었고, 따라서 왕도 높은 관직을 주어 우대하였다.

예를 들면 중종 때의 조광조는 교학(敎學)의 최고위 직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효종·헌종 때의 송시열은 예조참판에서 신임을 받기 시작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뒤에우의정·좌의정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세도의 신임과 위임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 이후 때에 이르러서는 치세(治世)의 도리를 주장하여 정신적으로 왕을 보좌하기보다는 실지로 정치권력의 행사를 위임받아 권세를 부리는 정치 형태로 변질되면서 세도(世道)는 흔히 세도(勢道)로 일컫게 되었다.

 

* 홍국영의 세도

정조 때의 홍국영은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공으로 도승지 겸 금위대장에 임명되어 왕의 신변 보호를 맡는 한편 모든 정사도 그를 거쳐 상주(上奏)하고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래서 요즘 흔히 쓰이는 뜻으로서의 세도 정치는 홍국영에서 시작된다.

홍국영 이후 세도 정치의 특색은 대개 척신(戚臣)으로서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면 관직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지명되었으며, 치세의 도리보다는 상하의 민정과 신임의 동향을 조사 보고하고 인사 행정에까지 직접 참여하여 권력의 남용을 초래함으로써 외척(外戚)의 발호를 보게 된 데 있다.

홍국영의 세도는 그의 부정과 부패 때문에 1780년(정조 4년)에 추방당하고 말았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불과 11세에 즉위하게 되자, 대왕대비였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통하여 경주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를 시작하였으나 수렴청정을 거둔 이후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아 김조순이 정권을 잡아 경주 김씨 세력을 숙청하고 이듬해에 그의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비가 되면서부터 외척 안동 김씨가 행하는 세도 정치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조선 후기에는 제도적으로 비변사()가 국정을 처리하는 중심 관서가 되어 있었다. 주요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비롯하여 행정·경제·사회 정책 등 국정의 거의 모든 부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언론 활동은 제외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공론과 언론의 의미가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비변사는 고위 관원으로 이루어진 구성원들이 회의를 통해 의견을 결정했으며 국왕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율성을 확보하였다. 그 회의는 비밀을 보장하게 되어 있었고 소수의 중심 인물이 회의를 진행시켰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세도 가문이나 인사는 그들을 대표하거나 대리하는 소수 인물들을 통하여 비변사를 장악함으로써 국정 운영 방침을 뜻대로 결정하고 국왕에게 보고한 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국왕은 형식상 정치 구조의 최고 정점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기는 했으나, 그 실질적 권한은 대단히 미약해졌다. 외척 세도 가문과 인물들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힘과 이익, 그리고 이념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려 했다. 김조순을 예로 들면, 그는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라는 권위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홍문관 대제학()과 규장각 검교제학()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세도 인물들에게서도 대개 마찬가지였다.

19세기에 들어오면 사회가 크게 동요하였으며 1862년에는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세도정치기 정부 인사들은 그러한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관계없이 대개 개혁이나 변통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구조적 사회적 문제들을 수령의 개인적 문제로 돌려버림으로써 사회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 자체를 회피하고 삼정()의 문란 등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무너져 가는 과거제에 대해서 몇 가지 복고적 방안을 논의했을 뿐이며, 소외된 서북의 지방민이나 양반 서얼들을 관료로 뽑으려는 노력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이후 세도정치


철종이 즉위하고는 그 비(妃)인 철인왕후가 김문근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게 되었다. 비록 왕족이라 하더라도 김씨의 세도에 억눌려 살아야 되었으니, 가령 왕족인 이하전이 과거 시험장에서 김씨의 자제와 싸워 패하고는 뒤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온갖 협잡이 성행하여 정치의 기강은 문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잡고 안동 김 씨의 세력을 꺾어, 한때 독재적인 세도 정치를 이룩하여 외척이 발흥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이 없어지는 듯하였으나얼마 뒤에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축출되고부터는 다시 한말까지 여흥 민씨 일족이 외척의 세도 정치가 그대로 지속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뒤에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민씨가 1천 명을 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비록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갑오개혁, 독립협회 등 민씨 이외의 세력들이 활동하기는 했지만, 이전 민씨의 세도정치와 그로 인한 개혁의 미비함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요인 중 하나임은 부인 할 수 없다.

 

신 안동 김씨

신 안동 김씨는 조선 후기 순조·헌종·철종의 3대에 걸친 왕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세도 정치를 행하였지만 홍국영이 세도 정치를 행한 이래 역대 제왕은 나이가 어려 세도 정치가 더욱 본격화되었다. 순조가 11살에 즉위하자 김조순이 자기 딸을 왕비로 삼아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많은 안동 김씨 일파가 요직에 앉았는데, 1827년(순조 27년) 세자가 정치를 대리하고 풍양 조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한 때 정권을 빼앗기기도 했다.

철종이 즉위하여 김문근의 딸이 왕비가 되자 김씨는 또다시 정권을 잡게 되어 김좌근(金左根) · 김재근(金在根) · 김수근(金洙根) · 김병익(金炳翼) · 김병국(金炳國) 등이 국정을 좌우하는 중심 인물이 됨으로써 김씨의 세력은 절정에 달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김씨 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풍양 조씨

풍양 조씨는 조선 후기 헌종 대를 통해 왕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아 세도 정치를 행하였다.

1827년(순조 27년)에 왕세자가 부왕의 신병 요양으로 인하여 정치를 대리하게 되자 조만영의 딸을 비(妃)로 삼아 조씨 일파는 김씨 일파와 세력 다툼을 벌여 한동안 세도를 잡았으나, 그들간의 불화 반목으로 세도가 무너지게 되었고, 철종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반남 박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가 반남 박씨이다. 덕분에 수빈 박씨의 아버지인 박준원은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당시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던 시기에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 자리까지 오른다. 수빈 박씨의 오라비인 박종경과 박종보도 순조 대에 세도가로 이름을 떨쳤다. 박종경은 풍양 조씨 조득영의 상소로 물러나게 된다. 이 외에도 박기수, 박회수, 박윤수 등이 있다. 반남 박씨는 순조 때와 헌종 초에 세력을 잡았으나 철종 시절 핵심 인물들이 사라지자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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