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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연산군, 천명의 기생과 향락을 즐긴 폭군 그리고 그의 최후

by 무님 2020.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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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어린시절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되었다. 하지만 어린 연산은 그 사실을 정확히 알지도 못한채 가족들이 자신을 멀리 한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끼며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런 연산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의 사연을 알게 되고 그 사건을 방관하고 외면했던 이들에게 복수을 칼날을 갈기 시작한다.

그리고 왕권을 잡기 위한 무오사화를 일으키며 많은 피를 보게 된다. 또한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하기위해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궁에는 피바람이 멈출날이 없었다. 연산의 만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연산군 11년인 1505년 6월, 연산군은 전국 팔도의 미녀와 튼튼한 말을 구하는 지방 관리인 '채홍주사'를 파견한다.

"이제 이계동을 전라도에 , 임숭재를 경상도.충청도에 보내 채홍준사라 칭하여 좋은 말과 아름다운 계집을 간택해 오게 하라"  <연산군일기>

 

또한 천 명의 기생들을 둔다. 그중에 재주만 뛰어나면 '운평'이라 하였고, 재주뿐만 아니라 미모가 아름다운 기생은 '흥청'이라 불렀다. 이들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세조가 세운 원각사에 수용되었다. 연산군은 수많은 기생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궁궐에서 함께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놀이 때문에 국고는 텅텉 비게 되고, 나라가 망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다. 연산군이 기녀들을 불러 향락을 즐겼던 말의 유래가 '흥청망청'이다.

 

‘흥청망청’이란 말은 돈이나 물건을 마구 사용하거나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연산군문에 생겨난것이다.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던 연산군은 마침내 채홍사라는 관리를 파견해 각 지방의 아름다운 처녀를 궁궐로 뽑아 오게 했는데 그 숫자는 무려 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외모가 예쁘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여자들을 ‘흥청()’ 이라고 불렀으며 맑은 기운을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연산군이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는 뜻에서 백성들은 ‘흥청망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처용무

 

또한 연산군은 처용무를 좋아하고, 이를 즐겼다.

" 왕이 술에 취하면 기꺼이 처용의를 입고서 처용무를 추며, 또한 스스로 노래하기도 하였다. " <연산군일기>

심지어 기생 앞에서 처용무를 추며 기생들에게 춤을 가르쳐달라 지시하기도 하였으며, 처용무에 능한 사람은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었다. 또한 연산군은 유교국가에서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서슴없이 하였다. 학문을 연구하는 성균관의 대성전을 동물을 풀어 사냥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연산군에게는 그를 보필할 강직한 신하들이 한 명도 없게 된다. 두 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입바른 이야기를 하는 신하들은 죽거나 유배를 당했으므로 연산군의 주변에는 임사홍과 같은 간신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신하들조차 그를 포기하며서 그에게 남아있게 되는 신하는 내시 김처선이었다. 내시로서의 최고 관직인 '상선'에 올랐던 김처선은 세종때부터 연산군까지 왕을 모신 인물이었는데 이런 김처선도 더는 참지 못해 연산군에게 간언을 하자 화가 난 연산군은 김처선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활로 쏴 무참히 살해한다. 

 

폭군인 연산군을 참을 수 없던 신하들은 반정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급기야 1506(중종 1) 훈구파를 중심으로 연산군을 폐위하려는 정변이 계획되었고 이에 이조참판 성희안() ·중추부지사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켰으며 연산군은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다. 실록에는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폐위된지 두달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연산군의 마지막 유언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연산군의 아내)를 보고 싶다고 하였다. " <연산군일기>

평소에는 장녹수를 가까이하더니,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조강지처를 그리워한 것이다.

 

연산군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조선전기 제10대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무덤. 묘. 사적

사적 제362호. 지정면적 1만4301㎡. 연산군은 실정()이 극심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같 은해 9월 강화군 교동()에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에 천장( : 묘를 옮김)하였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영의정 승선()의 딸로 1488년(성종 19) 2월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94년 왕비로 진봉()되었다가 1506년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어 부인()으로 강봉되었으며 1537년에 죽었다.

분묘는 서편에 연산군, 동편에 부인의 묘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역은 대군()의 예우()로 장례하여 곡장(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묘비()·혼유석()·장명등()·향로석()·문인석()·제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석마()·석양()·사초지( : 오래 되거나 허무러진 곳에 떼를 입히어 잘 다듬은 곳)는 설치하지 않았다.

연산군묘비 전면에 '연산군지묘()’, 후면에 ‘정덕 8년 2월 20일 장()’, 부인 신씨의 묘비는 전면에 ‘거창신씨지묘()’, 후면의 경우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6월 26일 장()’이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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