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폭군 연사군의 첫 번째 피바람 '무오사화'

by 무님 2020. 3. 9.
728x90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을 닮고자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고, 신하들의  목소리에 경청하였다. 그렇다 보니 성종과 대신, 대간들 간의 적절한 균형 속에 정치가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왕권이 약화될 소지가 있었다. 특히 바른 소리를 하는 대간의 행동이 왕권강화를 원하는 연산군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 무오사화 '가 일어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총 4차례의 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사화란 조선의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한다. 연산군 때에는 총 2차례가 일어나게 된다.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사초가 계기가 되어 일어나게 된다. 사로란 <실록>을 만들기 위한 역사기록이다. 사초 중에서도 사림의 대표 주자였던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계기가 되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조의제문>이란 김종직이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말하는 것이다. 

 

<조의제문의>

' 김종직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중국의 의제가 슬픈 얼굴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중국은 이역만리 땅인데도 말이다. 김종직은 이렇게 생각했다. 

" 의제가 왜 하필이면 내 꿈에 나타났을까? 향우에게 죽임을 당한게 억울해서 그런 게 아닐까? "

중국의 항우는 황제였던 의제를 죽인 후 시체를 물에 던졌다. 공교롭게도 김종직이 꿈을 꾼 때가 바로 세조가 조카 단종을 쫓아낸 날이었다. 이에 의제의 죽음을 슬퍼하며 김종직이 글을 쓴 것이 바로 <조의제문>인 것이다.

문제는 항우는 수양대군을, 의제는 단종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김종직이 죽었는데, 그의 제자들이 후세에 이를 남겼고, 이를 역사 기록소에 껴 놓았는데 이것을 훈구대신이 발견하게 되면서 사화의 시작이 된다.

 

<무오사화>는 시작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이를 발견하고 훈구세력인 유자광에게 알리면서 시작된다. 원래 사관은 기록을 절대 외부에 알리면 안 된다. 하지만 사관이 훈군세력의 유자광에게 알리게 되고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이를 고한다. 연산군은 왕권강화의 걸림돌이었던 사림파의 세력을 약화시킬 궁리를 하던 참에 유자광의 보고는 큰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을 읽으며 화를 금치 못 했다. 연산군은 수양대군의 증손자이기 때문에, 증조할아버지를 비방한 건 곧 왕인 자신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였다. 이렇게 훈구파의 계략과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연산군의 목적이 일치하게 되면서 많은 사림파 관료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사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고, 동시에 엄청나게 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쫓겨나거나 목숨을 읽게 된다. 부관참시란 관을 절단하고 시신을 다시 벤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있던 형중에 가장 극형이다.

 

이로써 연산군은 걸림돌인 사림을 치우며 왕권의 강화를 넘어선 폭군의 길을 가게 된다. 연산군은 조선의 27명의 왕중에 최악의 왕이라 말할 정도의 폭군이다. 예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연산구이 기르는 상냥개로 인해 궁궐은 개 짖는 소리가 가득하여 나랏일을 논의할 때에도 개가 나타날 정도였다고 한다.

 

"궁권 안에 사냥개를 많이 길러서 때로는 조회때에 함부로 드나드니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연산군일기>

 

심지어 궁궐 주변의 집을 허물기까지 하여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의 절이나 암자를 폐쇄하였고,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궁궐을 내려다 보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또한 신하들에게는 신언패를 차게 하였다고 한다. 신언패란 '말을 삼가하라'라고 적힌 패이다. 한마디로 입을 단속하라는 협박이었던 것이다.

 

신언패의 내용

연산군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이 커질수록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