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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16대 왕 인조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다

by 무님 2020.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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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자 화백(). 호 송창(). 휘 종().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으로 ), 어머니는 인헌왕후()이다. 비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 계비()는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에 봉해졌다가 후에 능양군()으로 진봉되었다.

 

조선 16대 왕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 뒤에 으로 추존됨)과 좌찬성 구사맹의 딸(뒤에 인헌왕후로 추존) 사이에서 맏아들로 1595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인조가 해주에서 출생한 것은 왜구의 침입으로 왕족들이 해주에 피신 중이었기 때문이다.인조의 조부가 되는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늙어서 얻은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은 광해군의 견제를 상당히 받았다.

후궁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원군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자식으로는 인조(능양군) 외에도 능원대군 보, 능창대군 전, 능풍군 명이 있었다. 아들 덕분에 죽어서 왕으로까지 추존된 정원군은 생전에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아들인 능창군이 모반죄로 모함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자, 그 뒤로 몸과 맘이 상하여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1623년 김류()·김자점()·이귀()·이괄() 등 서인(西)의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거사를 직접 진두지휘 하였다. 인조는 계획이 여러 사람들 입을 통해 누설될 위기에 처해지자 서두를 수 밖에 없었고 조바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인조는 예정일 보다 일찍 반정을 일으켰고 이런 탓에 치밀하지도 못한 느낌이지만, 군왕이었던 광해군은 무방비 상태였다.인조를 포함한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로 쳐들어 갔고 반정이 성공했다고 느낄 무렵 궁궐에 불을 질렀다. 반정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들에게 ‘궁궐에 불길이 보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궁궐에 불길이 솟자 이를 본 광해군은 옆에 있던 내시에게 "타성()이 역모를 했으면 종묘에 불을 질렀을 것이니 올라가서 살펴보라"고 했다. 내시는 함춘원(: 창경궁 홍화문 밖 동쪽에 있는 정원)에 불이 난 것을 종묘로 착각하고는 "종묘에 불이 붙었나이다"라고 보고했다.

“내 대에 와서 종묘사직이 끝나는구나.” 광해군은 긴 한탄과 함께 북문 담을 넘어 도망쳤다. 사실 궁궐에 불이 나기 전에 광해군은 반정의 고변을 보고 받았으나, 심각성을 몰랐고 위급함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광해군이 도망간 이상, 인조는 왕위에 오른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인 인목대비의 윤허가 없다면 왕위에 오른들 오래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조의 측근들은 대비가 있는 서궁으로 달려갔다. 처음에 인목대비는 반정을 믿지 않았다. 대비는 내가 “죄인(광해군)을 직접 봐야 너희들의 말을 믿겠다”라고 고집을 피웠다. 수색 끝에 민가에 숨어있던 광해군이 잡히자 인조는 직접 광해군을 데리고 대비전으로 갔다. 대비는 옥새를 가져오라 명령한 후 왕으로 책립할 준비를 갖추게 했다. 윤허만 내려 주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대비가 새삼스레 옥새를 가져 오라고 하자, 인조를 포함한 주모자들은 속이 타 들어갔다. 대비가 인조가 아닌 선조의 다른 왕자나 손자에게 옥새를 내어준다면 정변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다. 손쉽게 정변에 성공했지만, 마지막 대비의 윤허를 받기까지의 시간은 그들에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이괄의 난 전계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의 패륜행위와 실정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인조 반정의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인조 개인으로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왕위 찬탈로까지 이어진 것이고 그를 도운 서인 세력은 대북 일당독재로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을 믿어 줄 어리석은 백성은 없었다. 당시 여론은 이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서울에 입성할 때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서울을 떠나던 날, 그를 따르던 백성은 하나도 없었고 한강변에서 배를 타려 했을 때 백성들은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다.

파죽지세였던 이괄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인조는 여전히 왕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던 그의 처지는 늘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인조와 그를 추대한 공신들은 사림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했다. 겉으로는 효심에 찬 행동이었지만, 실제는 종법()적 정통성이 만들어 약했던 권력 기반을 다져볼 목적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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