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연산군시대 학자 김일손 <조의제문>을 사초하다

by 무님 2020. 4. 7.
728x90

김일손은 조선전기 『탁영집』을 저술한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 호는 탁영() 또는 소미산인().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김극일()이고, 아버지는 집의() 김맹()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자는 계운(), 호는 탁영() · 소미산인(), 시호는 문민()이다. 조부는 김극일(), 부친은 자진() 김맹()이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 호는 탁영(), 본관은 김해이다. 조부인 김극일()은 길재()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부친 김맹() 역시 가학을 계승하고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일손 또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김일손 가문은 정통 영남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셈이 된다. 어린 시절 김일손은 부친을 따라 용인에서 살았으며, 이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학]은 사림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영남사림파의 대표학자 김굉필()은 ‘소학동자’로 까지 지칭되었다. 15세에는 단양 우씨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이해 고향 청도를 거쳐 선산에 사는 정중호(), 이맹전()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16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예조의 복시()에는 실패했다.

17세 때 고향에 돌아온 김일손은 그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이 있는 밀양으로 가서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김종직은 김일손의 부친 김맹의 [효문명()]에서 청도에서 올라온 김극일의 두 아들 김기손()과 김일손을 가르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23세가 되던 1486년 청도군학()으로 있으면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다. 생원시는 장원, 진사시는 차석이었다. 이해 가을의 문과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자()로 관료로서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던 최부, 신종호, 표연수도 함께 급제하였다. 1487년 김일손은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진주목사와 진양수계()를 조직하였으며,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해 나갔다. 이후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자,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적극적이고 강직한 사림파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490년 무렵부터는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교정하고 증보(- 모자란 내용을 보탬)했다. 소릉(-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능)의 위호()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수양대군의 불법적인 왕위찬탈을 비판하고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조처로서, 나아가서는 세조의 집권을 돕고, 그 그늘에서 크게 권력을 차지한 훈구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사림파의 기수로 우뚝 선 김일손은 가장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시무책을 제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활동의 선두에 섰다. 무오사화의 시작은 성종 사망 후 실록청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망하면 바로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초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미리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권력을 누려온 전형적인 훈구파였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는 이극돈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때 불교중흥 정책을 편 세조의 눈에 들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것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의 위험한(?) 사초를 입수한 이극돈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일손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이극돈은 검증된 정치 공작의 귀재 유자광()을 찾았다. 유자광은 궁중에 자신과 연계하고 있던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여 김일손 등이 사초에 궁금비사()를 써서 조정을 비난했다는 내용을 올려 연산군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마침내 왕에게 올리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다. 독재군주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 셈이다.

 

김일손의 사초 중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진나라 말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이 글은 바로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글이었다. 당시 김일손은 모친상으로 청도에 내려가 있었지만 바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손한 언행이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사림파의 일망타진에 나섰다.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표연말, 정여창, 최부, 김굉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다. 김종직마저 그의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고 다시 처형하는 최악의 형벌인 부관참시()를 당했다. 이것이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로서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김일손의 묘가 구두실 부근 동쪽 산20번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탁영 선생 지묘’라는 비를 1635년에 목천 현감으로 부임한 박순인()이 세웠다고 한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