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조선 26대 왕 고종 < 이희 >

by 무님 2020. 11. 6.
728x90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재위 기간은 1863∼1907이며 아명은 이명복(), 초명은 이재황(), 후에 이희로 개명, 자는 성림(), 후에 명부()로 고침, 호는 성헌(). 영조의 현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여성부원군() 민치록(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이다.

 

 

고종의 장례식

 

 

척신()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의 폐지 및 삼군부()의 설치, 한강 양화진()의 포대()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인 당백전()의 주조()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통상수교거부정책,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명성황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명성황후와 그 일족인 민승호()·민겸호()·민태호()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고종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사대당()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조사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개화·수구()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계동궁() 등으로 이어()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미, 한·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일 간의 톈진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를 포기,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 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이완용()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종두()·우체사무·단발령·양력사용·도형폐지() 등은 이 해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있자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를 위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조병세()·홍만식()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 체제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승하하였다.

당시 고종의 사망을 두고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항간에 퍼졌다. 그날 고종의 병세가 위중하여 이완용이 궁에 머물며 숙직을 하였으며 궁전의 나인을 시켜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는데 식혜를 마신 후 복통으로 급서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일제는 《매일신보》에 기사를 내고 고종이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던 나인 2명도 잇따라 사망했는데 고종 승하 후 이틀  뒤  23일에 나인 김씨가 감기로 급사하고, 2월 2일에는 나인 박씨가 심한 기침으로 사망했다. 고종의 사망으로 항일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고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인산일)에 맞추어 3.1운동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의 홍릉()이고, 저서에 《주연집()》이 있다.

 

 

 

* 조선왕조실록  < 고종의 승하 그날의 기록 >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