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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물 사전

중종시대 관련 인물

by 무님 2020.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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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용개 - 1463(세조 9)∼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 자는 개지(), 호는 이요정()·송계()·수옹(). 대제학 신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숙주()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신면

이다. 어머니는 우군사용() 정호()의 딸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처음으로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 그 뒤 수찬·교리를 역임하였으며, 1492년 사가독서()를 하였다. 1494년 지평()이 되었으나, 간언()으로 문제가 되어 평시서령()으로 좌천되었다. 곧이어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1497년에는 검상()이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502년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성희안()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이 되었다. 그 뒤 대제학·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병조·예조의 판서를 역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성종은 신용개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 임금의 옷)를 벗어 입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경()이다. 저서로는 『이요정집』이 있고, 편서로 『속동문선』·『속삼강행실도』가 있다.

 

 

2. 심정 - 1471(성종 2)∼1531(중종 26).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 자는 정지(), 호는 소요정(). 심구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치()이고, 아버지는 부사를 지내고 적개공신()이었던 심응()이다. 어머니는 서문한()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화천군()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서 사은사(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에 남곤()·김극성() 등과 함께 모의하여, 김공저()와 조광보()를 제거하기 위한 옥사를 일으켜 인망을 잃었다.

1509년(중종 4) 성천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1515년 이조판서까지 승진했으나 삼사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다시 1518년에 형조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등의 사류()로부터 소인()으로 지목되고, 이조판서 안당()의 거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에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울분을 달래던 중, 아들 심사손()마저 사류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조광조 등의 사류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맺혀 틈만 노리게 되었다.

마침 1519년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를 요구하여,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았다. 이에 경빈 박씨()를 통하여 조씨전국(: 조씨가 나라를 오로지 한다.)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홍경주() 등과 모의하여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일망타진하였다.

그 뒤 남곤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다가 1527년남곤이 죽은 뒤, 좌의정·화천부원군()에 올라 수하에 이항()과 김극핍()을 두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동궁(: 후일의 인종)과 인척관계에 있으며 권력경쟁자였던 이조판서 김안로()를 귀양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김근사(), 대사간 권예()의 탄핵으로 강서로 귀양갔다가 이항·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으로 지목되어 사사()되었다. 후일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많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길이 매도되었다.

형제간에 우의가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라 불렸다고 한다.

 

 

 

3. 안당 - 조선전기 우찬성,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순흥(). 자는 언보(), 호는 영모당(). 서울 출신. 해주목사 안종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 안경()이고, 아버지는 사예인 안돈후()이다. 어머니는 사예() 박융()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안처겸()·안처함()·안처근()이 있다.

1480년(성종 11)에 생원이 되고, 이듬해 1481년(성종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성()을 거쳤다. 연산군 때는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년(연산군 2)에 장령(), 1506년(중종 1)에 연산군이 폐지했던 사간원이 부활되면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1507년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우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08년 12월에 순흥군()으로 봉작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형조·병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14년 11월에 호조판서, 1515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구폐를 혁신하고 분경(: 세가 등에게 하는 이권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관리 등용에 있어 순자법(: 근무 기간에 따라 차례로 승진시키는 제도)에 따르지 말고 어진 인재를 발탁해서 쓸 것을 주장하였다. 김안국()·김정국()·김식()·조광조()·박훈()·김대유()·반석평()·송흠() 등을 탁용하거나 천거하였다.

같은 해 8월 박상()·김정() 등이 중종의 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구언() 해놓고, 죄를 주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극구 변호하였다. 이 일로 자신도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사림으로부터 높이 추앙받게 되었다.

1516년에 직을 바꾸어줄 것을 청해 윤허받았으나 같은 해에 다시 호조판서로 기용되고, 1518년에 우찬성이 되었다가 그 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우의정 임명 과정에서 김전()과 경합했으나 사림 계열의 지지로 안당이 제수받게 되었다. 이 때 소격서의 혁파 등을 계청()했다. 1519년 정국공신()의 삭훈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극구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영의정 정광필()과 함께 조광조 등을 변호하여 구원하고자 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대간으로부터 계속 탄핵받았다. 더욱 현량과() 설치를 처음 주장한 사람으로서, 세 아들을 모두 천거되게 했다는 허물까지 쓰고 기묘당인의 우익으로 배척당하였다. 이 해 12월에 파직당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시 대간으로부터 고신()을 환수시킬 것을 요청하는 등의 탄핵을 받았다.

1521년 아들 안처겸이 처가에서 종실 시산부정() 이정숙(), 권전() 등과 함께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을 나누었다. 이 사건으로 안처겸은 송사련()에 의해 고변당하였다.

이에 남곤()·심정() 등의 여러 대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는데, 안당도 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연좌되어 교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심정 등이 집의() 윤지형()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것으로 신사무옥이라 이른다. 1566년(명종 21) 손자인 안윤()의 상소에 의하여 누명이 벗겨지고 복관되었다.

행동이 신중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공정한 성품으로 옳은 일에 용감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사림을 정계에 등용시키고 옹호하여, 사림에게 중망이 컸다. 시호는 정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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